오래 전부터 "용산을 지배하는 자가 이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교과서적인 최고의 풍수환경을 보여주는 용산은, 이제는 국민들의 품으로 들어가 안주해야 된다.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국민들이 찾는국립중앙박물관 외에는 그 어느 권력기관도 절대 들어서면 안 된다. 국민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고 쉬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의 희망차고 밝은미래가 있는 것이다...
밑에 좋은 글이 있어 달아본다...
"용산은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에 면하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도심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또 중국 등지에서 외지의 문물이 들어오면 한강 이남을 비롯한 서해안 지역으로 연결 해주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전국의 조운선이 몰려들면서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근대 철도가 개설된 이후로 한강의 수운이 쇠퇴하고 6ㆍ25 이후에는 휴전선으로 한강 하구가 막히면서 수로교통은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했다.
한강유역의 최초 지배자는 초기 백제였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됐다가 삼국이 통일되면서 용산은 최종적으로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군수창고였던 군자감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용산은 한반도 내 정치세력 간의 각축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외국 세력의 손아귀로 넘어간 시기가 적지 않았다. 고려시대 말이던 13세기에는 한반도를 침략한 몽골군이 일본 정벌의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 등에서 패퇴한 왜군이 용산일대에 주둔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진을 쳤고, 구한말 임오군란 때 다시 청나라 군대가 지휘소를 차렸다.
용산이 본격적으로 군사기지화한 시기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다. 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용산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워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미 24군단 소속 7사단 병력이 용산을 접수한 1945년 9월 이후 용산은 주한미군의 시대가 된다. 미군은 1949년 7월 군사고문단 약 500명만 남기고 철수했다가 이듬해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고 1953년 7월 휴전 이후부터는 용산기지를 다시 사용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1978년에 용산기지에 들어섰다.
73년 만에 주한미군의 용산시대가 저물고 평택시대가 열린다. 주한미군은 29일 오전 평택 ‘캠프 험프리스’ 기지에서 신청사 개관식을 갖고 공식 업무에 들어갔다. 한미연합사령부는 국방부 영내 7층짜리 독립 건물로 연말까지 이전하고, 용산의 주한미군 휴양시설인 드래곤힐 호텔이나 미국 대사관부지 등 일부 시설은 남는다. 그럼에도 ‘성조기’가 평택으로 옮겨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적지 않다. 용산의 역사는 외세의 침공, 외세 의존적인 우리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다시는 용산을 외세의 손에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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