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

  • 풍수지리와 양택건축
  • 풍수로 본 주택건축
  • 전원주택과 아파트
  • 사무실건물과 공장
  • 풍수유감

현재 위치

풍수유감

  • 죽은 자의 공간, 음택
  • 삶의 공간, 양택

죽은 자의 공간, 음택

1.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이란 천지자연(天地自然)에 순응하는 것
풍수지리학이란, 풍기(風氣)와 수기(水氣), 지기(地氣)와 천기(天氣)를 잘 감지(感知)하고 다루어서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천지자연(天地自然)에 순응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학문이다. 양택풍수(陽宅風水)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조건을 간편하고 편리하도록 개선하며, 수맥(水脈)의 탁기(濁氣)와 풍기(風氣)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피해를 예방함으로써 편리하고 건강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하고 필요한 공간구조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음택풍수(陰宅風水)는 죽은 사람이 자연으로 깨끗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천지자연의 운기(運氣)를 살펴 가기부(佳氣扶)를 가려서 모시며, 후손(後孫)들은 위선(爲先)을 올바르게 행(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우선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풍수는 형기(形氣)와 이기(理氣)를 두루 섭렵하여야 하고, 밝고 맑은 마음을 지니면서 사물(事物)을 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 혜안(慧眼)이 열리도록 수행(修行)을 하노라면, 기(氣)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며 천기와 지기, 수기와 풍기를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야만 올바른 풍수(風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학의 선인(先人)들, 특히 도선국사(道詵國師)나 남사고 선생(南師古先生) 같은 분은 기를 올바르게 터득하셨던 분으로 천지자연의 운행 이치(運行理致)와 운기(運氣)를 바르게 깨달으셨으므로 감여가(堪輿家)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의 탁월했던 능력이 후학(後學)들에게 전수(傳授)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들이 기술(技術)의 진수(眞髓)를 감추거나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풍수지리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이론은 기록을 통하여 전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 진수인 기감(氣感)을 터득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 없이는 전수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전수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형식적 논리에만 집착하고 그 진수인 기를 터득할 수 있는 수련(修煉)은 하지도 않은 자에게는 무엇하나 전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기를 터득하지 못하고 형기론(形氣論)이나 이기론(理氣論)을 펼치는 것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약삭빠른 풍수는 명당(明堂)의 가치도 없는 명당(?)을 팔기 위해 산(山)의 형상을 조작하고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선전한다. 형상만 보고 속아 넘어가기 좋은 행동을 서슴없이 해내는 세상이니, 기를 모르면 이같이 약삭빠른 사기꾼 풍수에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예를 들어, 정신(情神)이 없는 식물인간(植物人間), 거기에다 사지(四肢)에 의수족(義手足)을 착용한 사람을 모델로 놓고 판단하도록 해보자. 멀쩡하게 누워 있는 그 형상만 보고 형기론자는 정상인으로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 것이고. 이기론자도 의수족을 착용하고 있는 식물인간이라는 식별(識別)도 하지 못하면서 그 생활하는 환경이나 위치를 어느 특정방위에다 배치해야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고 엉뚱한 주장이나 펼치는 우(愚)를 범(犯)하게 될 것이다. 형기론자나 이기론자 공(共)히 형상과 논리보다 더욱 중요한 기를 터득해야만 올바른 형기와 이기를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를 바로 터득하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형상과 논리에만 치우쳐 고서(古書)에만 의지하려 하고 있다. 기를 모르는 형기는 알맹이 없는 씨앗이요. 기를 모르는 이기는 소리없는 음악이다. 따라서 풍기와 수기를 모르는 풍수는 더 발전하지 못하고 저급한 수준에 머무르고 말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지자연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처럼 으시대는 오만한 자세를 보인다면 무엇하나 올바르게 전수받을 수 없을 것이다. 기감을 터득한다는 것은 실력있는 지도자를 통하여 올바른 지침아래 꾸준히 수행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터득되어지는 것이며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터득시켜줄 수 없는 것이다. 기란 마음이 깨끗하도록 욕심을 떨쳐버리는 수행을 통하여 청정지심(淸淨之心)을 득(得)한 연후에야 바르게 터득될 수 있는 것이며, 기를 터득한 사람이라도 그 사용이 올바르지 못하면 자연스레 그 능력이 퇴화(退化)되어버리고마는 것이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면 항상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이며, 부단한 노력으로 끝없이 정진해야만 기감을 상실하지 않고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터득된 기감을 더욱 발전시키려면 스스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며, 욕심을 버리고 끊임없이 수련하여 절대경지(絶對境地)에 이르도록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이는 수행과정에 따라 얻어진 능력이므로 공익(公益)을 위하고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며 만인(萬人)을 위하여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2.명당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어야 찾을 수 있다
명당이란 많은 사람들이 갖기를 원한다. 명당을 찾아 사용하기만 하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다며, 즉 죽어가는 난치병(難治病)의 자식도 살리고 가난뱅이가 노력하지 않아도 흥부처럼 박씨를 얻어 큰 부자가 되며 또한 엄청난 권력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하면서 욕심을 부리지만, 구하려는 사람마다 길바닥의 돌멩이 줍듯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다고 믿어야 될 것이다. 또한 명당이란 그 차등(差等)이 천차만별이고 사람 또한 그 됨됨이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분수에 맞는 적절한 등급의 자리를 선택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용해야만 명당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명당을 찾아야만 틀림없이 좋은 명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이란 그 형상이 천태만상(天態萬象)이고, 각각의 산들이 발(發)하는 정기(精氣)가 다양하기 때문에 매장될 사람에 따라서 개개인의 조건에 잘 맞도록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명당으로써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풀이한다면, 갑(甲)이 들어가서 명당이 될 자리에 을(乙)이 들어가서는 명당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연은 그 때를 맞추어 명당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또는 명당을 망지(亡地)로 변형시키기도 한다는 이치를 운기(運氣)를 터득한 사람이나 자연관찰(自然觀察)에 도통한 이들은 능히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건물이 들어설 평지에도 천기와 지기를 고루 받는 명당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도 그 사용자가 합당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일류명당도 망지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며, 이렇게 잘못 사용된 망지는 그 지세를 잘 관찰하여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아주 좋은 명당으로 가꾸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자연을 슬기롭게 잘 다스리면서 있는 그대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 나가야만 한다. 어제의 명당이 오늘에 와서 망지가 되어버리는 일이 허다하고 어제의 망지가 오늘은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오지 않았던가. 명당이란 찾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서 알맞는 터를 선택해야 하며, 그 사용이 합당해야만 좋은 명당이 되는 것이다. 산에는 그 산이 지니고 있는 정기를 올바르게 나타내는 곳이 있게 마련이고, 강이라면 그 강물의 흐름에 따라 청탁(淸濁)이 있는 법.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슬기롭게 찾아내고 청탁을 구분하여 유용하게 이용한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풍부한 선물을 끊임없이 만들어줄 것이다.

천장지비(天藏地秘)의 명당은 아무나 쉽게 찾아낼 수 없다
천장지비(天藏地秘)란 ``하늘은 감추고 땅은 비밀로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 감추어져 있으며 아무나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것이 또한 명당이다. 천장지비의 명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천장지비의 명당은 왜 찾아내지 못하는 것인가? `효, 즉 인륜지본(孝卽人倫之本)'이라, 부모나 선대 조상님들이 돌아가시면 편하고 좋은 곳에 모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한다는 자세가 바른 효행이며 위선(僞善)인 것이다. 조상을 명당에 모셔야만 음덕(蔭德)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하에 발복(發福)만을 기다리며 욕심을 부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그릇된 행위라 하겠다. 이러한 졸부들이 찾는 명당이란 어떤 것인가. 부모님이나 조상들을 편하게 모시려는 효행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조상들을 잘 모신다는 위선이라는 명분 아래 감추어진 내면에는 조상들을 명당에 모셔놓고 그 덕분으로 한세상 잘 살아보자는 시커먼 속셈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효행이고 위선이라 할 수 있겠는가. 효행이란 조건 없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 하겠으나, 행은 사라지고 효를 논하기만 하는 그들은 부모님 돌아가시면 명당을 골라 묘지를 번듯하게 잘 치장하여 모셔놓은 후에 발복만을 기다린다. 자기 탓으로 괴로운 일이 조금만 생겨나도 발복이 안 된다고 엉뚱하게도 풍수를 나무라며 다른 풍수를 돈으로 매수하면서 새로운 명당을 찾아 부모님 산소를 마구 파해치고 이리저리 옮겨보며, 급기야는 불에 태우고 물에 띄워버리는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곤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라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런 모습에서 어떻게 효행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명당이 손에 잡힐 리 만무하다. 이러한 졸부들의 부모들이 살아왔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들추어 보면, 그 모습들은 또 어떠했을까? 그들이 살아왔던 발자취에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의 탈을 쓰고, 금수(禽獸)처럼, 양심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온 모습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저지르면서 마구잡이로 살아왔던 그들. 그 동물적인 욕구를 채우느라 혈안(血眼)이 되어 제멋대로 나쁜 짓은 다 저지르면서 살다가 죽은 그 부모를 후손들은 성인군자(聖人君者)처럼 위장하고 포장하여 명당을 찾아 모시면서, 거창하게 비석(碑石)이나 세워놓고 살아계실 때에 하지 못한 효를 갑절로 행한다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다. 여기에 덩달아 명당을 고르는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어 돈을 듬뿍 받고 묘지터를 알선해 주는 저급한 풍수가 끼어들곤 하지만, 이러한 졸부의 마음가짐과 저급한 수준의 풍수의 눈으로는 절대로 명당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있어서 그들 풍수의 눈을 가리어 못 보게 할 것이요, 땅은 수맥(水脈) 위를 명당으로 보이도록 위장하여 그들을 현혹하고 혼동하도록 한다. 이것이 곧 천장지비(天藏地秘)다.

명당이라고 모든 유골이 황골(黃骨)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명당이란 천기와 지기가 교합(交合)되어야 하고, 수기와 풍기를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만 명당이 되는 것이다. 풍기는 살벌하지 않고 온화해야 하며, 수기는 한조(寒燥)하지 않으며 청량(淸凉)하고 잔디가 잘 자랄 수 있는 정도의 수분은 지니고 있어야 하며 건수(乾水)가 광중(壙中)에 드나들지 않아야 한다. 날씨가 추울 때마다 서릿발이 크게 서는 곳은 건수가 많은 곳이며 잔디의 뿌리가 들뜨게 되므로, 해동하면 잔디를 잘 밟아주어 뿌리가 안정되게 해주어야만 잔디가 잘 자란다. 또한 이러한 곳에서는 용미(龍尾)를 높이고 앞이 약간 낮아지도록 손질하여 배수(排水)가 잘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형상으로 보아 명당인데 수맥이 지나가면 당판(堂坂)에서 수맥과의 거리가 석자 이상 떨어지도록 천광(穿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수맥이 입수(入首) 전에 있거나 전순(氈脣)에 있는 것은 무관하며, 오히려 지기의 흐름을 조절하여 더욱 좋은 명당으로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기의 흐름은 기감을 아는 사람이면 그 흐름이 당판 심부(深部)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인지 주산(主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다. 지기는 그 감(感)이 온화하고 맑아야 좋은 것이다. 그래서 기감이 탁(濁)하면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었어도 명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기는 음기(陰氣)로써 양기(陽氣)인 천기와 교합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맑고 밝은 감이 있어야 명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의 기가 감응(感應)되지 않을 때에는 교세(交勢)나 사격(砂格) 모두가 소용없는 허상(虛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당은 수맥의 흐름과 지기의 머무르고 흐르는 이동이 있어야 하고, 지기의 흐름이 부드럽고 청기(淸氣)를 띠어야 한다. 이러한 곳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기와 천기가 잘 교합되는 곳이다. 이렇게 모든 자연조건이 제대로 구비되어질 때 넘치고 모자람이 없는 곳, 즉 충(沖)이 없는 대명당(大明堂)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풍수들의 주장으로는 명당에 모신 유해(遺骸)는 황골로 변하게 되고, 또한 황골로 변해야만 명당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명당이라도 황골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형기론과 이기론 양자 모두 학문적으로는 많은 발전이 있었으나, 무덤을 파묘(破墓)하고 이장(移葬)을 체험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유골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검증해 놓은 자료들이 전무(全無)한 실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주 최근에 와서야 일부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기회가 있으면 이론에 따라서 확인해 보려는 노력을 조금씩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나마 화복론(禍福論)에 얽매이고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결론에 부닥치게 되면, 이해관계(利害關係) 때문에 함구(緘口)하며 바른 관찰이나 발표를 하지도 못하는 실정인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인체에 관한 전문지식 없이 시신(屍身)이나 유해(遺骨)를 만지는 사람들이라 더더욱 바른 판단은 기대할 수도 없거니와, 과거의 이론만 답습(踏襲)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 풍수지리학계의 실정이다. 명당이란 습(濕)하지 않아야 하고, 수기(水脈)의 영향력으로부터 피해야 하며 지기를 잘 받을 수 있도록 그 심도(深度)를 조절하여 매장해야만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세(局勢)가 좋고 사격(砂格)이 좋다 하더라도 기맥(氣脈)을 잘 조절하지 못하거나 수맥의 영향력을 피하지 못하게 되면 망지(亡地)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근래 10여 년 동안의 경험 중에 공동묘지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이장이 불가피한 수십 기(基)의 이장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蒐集)하여 이를 분석해본 결과 명당자리에서도 황골이 아닌 백골(白骨)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풍수 이론대로 명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었으나, 거듭된 경험에 따라 유골의 주인이 몇 살에 돌아가셨느냐에 따라서 명당에서도 황골이 될 수도 있고 백골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골격(骨格)이 단단하고 정수(精髓)가 넘치는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여 명당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황골로 변하게 되며, 노년(老年)에 돌아가신 분, 특히 70~80 이상 장수하시고 돌아가신 분은 아무리 좋은 명당에 모셨다 하더라도 황골은 되지 못하고 백골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과도한 파정(破精)으로 인하여 골수(骨髓)가 강건하지 못한 사람도 황골이 되지는 않는다. 그 원인은 골밀도(骨密度)가 조밀(稠密)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뼈는 소골(燒骨)이 잘 되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 의학적으로 골밀도를 측정하여 보면 골다공증(骨多空證) 환자를 쉽게 가려낼 수가 있다. 골다공증 환자는 골수가 부족하여 유골이 연약(軟弱)하고 잘 부러지며 소골이 잘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체질적으로 황골과 백골이 되는 요인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니 장소만 가지고 황골이니 백골이니 하는 것은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종래의 풍수지리학계의 이론은 검증을 통하여 재확인하고 번복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명당을 파묘하여 유골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법의학적 판단으로 그 분이 돌아가신 연령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으며, 황골이나 백골로 변하게 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울러 풍수지리학적 측면의 화복론에서 주장하는 이론처럼 조상을 명당에 모시고 유골이 황골이나 백골로 변화된 집안을 조사해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비교적 순조롭게 풀려나갔던 것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반면에 수맥이 존재하는 장소에 시신을 모시게 되면 연령에 관계 없이 시신은 검은 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수맥의 깊이와 수량(水量)에 따라 시신의 변화된 모습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수맥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관찰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루에 몇 톤의 물이 흐르는지, 수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맥의 깊이가 시신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수맥의 크기는 작을수록 땅 속 깊은 곳에 위치할수록 시신의 변색은 검은 색에서 밝은 색을 보인다. 또한 소골이 되는 시간도 수맥의 크기나 깊이에 따라서 그 차이가 대단히 심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수맥은 없으면서 건수가 드나들거나 광중(壙中)에 물이 고여도 검은 색을 띠게 되며, 소골이 되는 시기가 빠르므로 묘지에 모시면서 수맥을 관찰하지 않는다면 명당에 모시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명당에 모셨다고 모두 황골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명당이란 외관상으로 지세가 아무리 좋아도 수맥으로 인하여 망지가 될 수도 있고, 정확한 자리를 짚어 쓰기만 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명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묘지를 쓰더라도 수맥만 잘 피하고 배수가 잘 되도록 묘지를 손질한다면 황골로 변화된 유골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음도 알아야 하며, 명당이면 황골이 나온다는 등식은 타파되어야 한다.

음덕(蔭德)이란 선대(先代)의 후광(後光)
음덕이란 무엇인가? 화복론(禍福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명당에다 묘지를 쓰게 되면 그 후손에게 돌아오는 복" 이라 설명한다. 이는 한자(漢字)가 뜻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잘못된 해석이라 하겠다. 음덕이란 아무에게나 풍수가 명당을 찾아준다고 해서 그 자손들에게 발복되는 덕이 아니라, 고인(故人)이 살아 생전에 남모르게 쌓았던 음덕이 고인이 영면(永眠)에 들고 난 후, 즉 ``금잔디를 이불로 덮고 나서야 천지(天地)가 이를 밝혀내어 축복(祝福)으로 후손들에게 그 덕을 되돌려 주는 것" 이 올바른 해석이다. 음덕(蔭德)이라는 음(蔭)자는 음덕의 음(陰:그늘 음)에 풀 초(艸)를 덮은 음(蔭:가리울, 덮을 음)자다. 쉽게 풀이한다면, 고인이 주어진 수명을 다하고 지하에 묻혀 있어도 살아 생전에 베풀고 쌓았던 적덕(積德)의 비중만큼, 아니면 그 몇백 배로 배가(倍加)된 축복으로 자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살아 있을 때 남모르게 배풀었던 그 음덕이 사후(死後)에야 밝히 들어나게 되어 이웃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하늘은 그 후손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인데도, 올바르게 공부하지 못한 풍수는 음덕이라는 후광이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것인 줄도 모르기 때문에, 평생을 금수보다도 못하게 욕심만 부리고 살다가 죽은 자도 명당에만 들어간다면 발복이 된다는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명당을 찾아줄 수 있겠는가. 명당이 있어도 그런 자에게는 권(勸)할 수도 없고 권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쯤은 풍수들이 지녀야 할 기본윤리의 덕목이라는 것을 먼저 배우고 패철(佩鐵)을 만져야만 명당을 올바르게 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명당은 교만한 풍수의 눈을 가린다. 살인만행을 저지르거나 나만 잘 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올바르게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힌 자들이나 그를 도와주었던 자를 살펴보면, 형상론적 명당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형기론적(形氣論的) 명당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풍수지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나름대로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사람에게 일류풍수가 잡아준 명당자리가 미사여구(美辭麗句)만 펼쳐놓은 허구(虛構)의 명당이었으며 망지였다는 것을, 풍수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크나큰 수맥이 지나가는 사실을 감지하는 능력도 없으면서 어리석게도 수맥 위에다 외관상의 치산명당(治山明堂)을 꾸며놓고 결과가 자신의 주장과 반대로 나타나자 이제 와서는 자신이 골라준 자리가 아니라고 서로 발뺌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비굴한 모습들이 매스컴을 타고 전국으로 보도된 사건이다. 그 후손들에게 발복은 커녕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며 풍수가 아닌 사람들도 다 같이 동정하고 측은하게 생각하지만 애꿎은 풍수만 무능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부덕한 자가 명당을 찾아 평안하게 들어가는 것을 하늘이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수의 눈을 가리어 명당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버렸으니, 그 누가 나서더라도 부덕한 자에게는 명당을 찾아줄 수 없는 것이다. 살인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겠고, 부덕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천지자연의 조화이며 이치가 아닐까. 음덕을 쌓으면서 사람답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름 있는 풍수가 자리를 잡아주지 않더라도 좋은 자리에 제대로 모셔져 있다는 것을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작은 옷이 제격이며 편안하듯이 키큰 사람에게는 키에 맞는 큰 옷이라야 잘 맞는 법이다. 그러나 제 격에 알맞은 옷을 골라 입혀야 평안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다섯자 체격에다 열자 크기의 옷을 입혀드렸다면 행동하기에 얼마나 불편할지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 하겠다. 특히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또한 풍수지리학자가 천지자연의 조화와 이치를 바르게 깨닫고 자연에 순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풍기와 수기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기란 요원하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세상에서 부질없는 과욕을 부리다가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우(愚)를 범하지 말고, 항상 밝고 깨끗하게 마음을 가꾸어 정진해 나가야 한다. 풍수인은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협력 정진하며,정도(正道)를 깨우치기 위해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 또한 기감을 올바르게 터득해야 하며, 수준 높은 감여가(堪輿家)가 되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3.풍수인(風水人)이 갖추어야 할 것
풍수인은 풍기(風氣)와 수기(水氣)는 물론, 천지자연의 운행질서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풍수란 풍기와 수기를 잘 감지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야 천지자연의 운행질서(運行秩序)와 운기를 감지하게 되며 조화에 순응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리도덕의 올바른 기준 아래 도인적 자질을 다듬어 나가야 저급한 풍수에서 품격이 한층 더 높아지게 될 것이며, 감여가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어야만 올바른 풍수인이라 하겠다. 하지만 오늘날 풍수지리학계의 현실은 어떠한가. 도덕적 개념도 기준도 사라지고 형(形)과 이(理)만 배우는 풍수들, 자신들을 과대포장하기에 급급하여 말만 내세우고 풍수의 핵심인 풍기나 수기를 느끼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알맹이 없는 풍수들, 파구득수(破口得水)만 따지다가 수맥 위에 시신을 매장하여 명당을 망지로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나서도 큰 소리치는 수준 이하의 풍수들, 산의 형상만 보기에 급급하면서도 형기론이라 주장하는 형상론자들, 패철을 보면서 글자풀이하기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이기론이라고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눈으로 보이는 산의 형상만 따져보고 명당이라 결론짓고 고총(古塚)의 유무를 판별할 능력도 없는 저질풍수가 땅을 파다가 선점자(先占者:遺骨)가 있으면 슬쩍 감추거나 옆에다 남모르게 묻어 없애버리고 시치미떼고마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께서 ``풍수지리학은 망국지본(亡國之本)" 이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서슴없이 경계(警戒)의 말씀을 하신 그 배경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겠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선생의 그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오늘의 풍수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겸허하게 스스로를 되돌아 보아야 할 필요를 느껴야 한다.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상에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한 현실사회 안에서 혼자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되어보겠다는 욕심덩어리 졸부들의 욕구충족에 동조하며 화복론이나 펼치면서 놀아나는 사이비 풍수는 절대로 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청정지심(淸淨之心)을 되찾고 무욕정진(無慾正進)으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혜안(慧眼)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올바른 풍수인이 되는 정도(正導)라 하겠다.

풍수인은 욕심을 버리고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풍수(風水:風水人)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섭리를 잘 살피고 따르며, 순천(順天)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풍수는 윤리와 도덕을 충실히 지켜 나가야 하며 도덕적 기준도 높아져야 한다. 풍수지리학을 바로 배우기 위해서는 고전(古典)을 두루 섭렵하여야 하며 그 말들을 바로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섣불리 알아듣고 화를 부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편견된 판단으로 선의의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항상 깊이 생각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감을 터득하는 것이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기란 우선 내공(內功)과 외공(外功)으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으며, 기감 터득에는 외공수련보다 내공수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 하지 않았던가. 소우주인 자신을 바로 알게 되면 대우주(大宇宙)의 운기(運氣)는 자연스럽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기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고전의 말씀들이 하나 둘씩 터득되는 법이며, 그 첫단계로 풍수가 갖추어야 할 풍기와 수기를 먼저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풍기는 기감을 모르는 사람들도 지세를 보고 대충 짐작할 수는 있으나, 풍기를 정확하게 감지하게 되면 식물의 성장이나 곤충들의 생활조건 등을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다음 수기(水氣)는 수맥의 크기와 흐르는 방향, 그리고 그 위치와 깊이, 수량 등을 감지할 수 있어야만 수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계산할 수 있으며, 이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지기(地氣)를 감지할 수 있게 되고, 더욱 숙련되면 기의 청탁을 구분할 수도 있는데, 청탁에 따라서 유익하게 활용될 곳인지 아니면 무익한 곳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서야 된다. 하지만 풍기와 수기, 지기를 알고 나서도 청탁을 바로 가릴 수 없다면 섣불리 길흉화복 운운하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천기(天氣)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천기를 감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청탁을 느낄수 있게 된다. 풍수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것을 조심하게 되고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게 되며, 자신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천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활용하고 봉사해야 하며 교만해지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풍수는 무리하게 화복론으로 풍수지리학을 모르는 사람들을 현혹해서는 더욱 안 되며, 동일여건내에서 흉지(凶地)는 피하고 최상의 자리를 찾도록 노력하되 음택의 주인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고 나서 선택해 주어야 한다. 특히 음택풍수는 지금까지 완전하게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음택 선점자(陰宅先店者:古塚)를 물리적 힘이 없다고 함부로 파해치거나 다루어서는 안 된다. 고총(古塚)을 무시하는 행위는 강도 행각과 다를 바 없으니, 후손들이 돌보지 않는다고 마구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에 실수로 고총인 줄도 모르고 땅을 파다가 유골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 도로 묻어주어야 하며, 유골을 버리고 새로운 시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풍수의 윤리상 있을 수 없는 만행이라 하겠다. 그런데도 고총이 있는 곳을 명당이라고 알선하면서 많은 돈을 받아 챙기는 불미스러운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말장난만 잘 하는 이런 저질풍수를 따라 다닌다면 과연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 고약한 독소가 풍수지리학계를 얼마나 더럽히게 될 것이며, 또한 후학들에게 미치게 될 폐해(弊害)가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4.명당을 망지(亡地)로 만든 풍수(風水)
전국의 산지를 답사하다 보면 안타까운 상황을 많이 보게 된다. 올바른 제자리〔穴〕는 남겨두고 위쪽이나 아래쪽 아니면 옆에다 유택(幽宅)을 잡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이기나 형기를 두루 섭렵하지 못한 풍수 선생들의 졸작이라 하겠다. 제자리에서 가까운 곳을 마구 파헤쳐 놓았으니 정작 좋은 자리는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명당이 망지가 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제자리를 점지할 수 있는 혜안을 갖지도 못하면서 패철만 들고서 득수(得水)와 파구(破口)가 어떠하다며 방위만 운운하는 이기론자나 좌청룡과 우백호, 그리고 안산(案山)이 어떠하다며 몇 가지 풍월이나 읊어대는 형기론자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된다. 이것은 죽은 자에게도 몹쓸 짓을 하는 것이며,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도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치나 형상만 알고 기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올바른 풍수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하겠다. 그렇다면 명당을 망지로 만든 실례를 그림을 보면서 살펴보자. 먼저 명당(明堂=穴坂, 堂坂)의 생김새부터 정확하게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그림 48). 혈의 생김새를 알아두어야만 사이비 저질풍수 선생에게 사기당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48. 명당의 생김새 그림49. 명당에서 사자(死者)를 앉힐 바른자리 찾기.

뒤에 있는 주산(主山)에서부터 맥(脈)을 이어받은 혈판은 입수(入首 : ①), 양 선익(兩 蟬翼 : ②,③), 당판(堂板 : ④), 전순(氈脣 : ⑤)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5가지 요건을 혈의 5악(五嶽)이라 하며, 이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혈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다. 입수란 주산에서부터 흘러온 기맥을 조절하여 당판으로 내려보내는 조정자 역할을 하며, 선익은 혈판을 물이나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전순은 혈판을 받쳐주는 축대(築臺)의 역할을 담당한다. 입수가 없으면 기의 영향이 미미하며, 선익이 없으면 혈판 속에 물이 고이거나 바람이 스며들며 시신의 육탈이 더디어지거나 유골이 시커멓게 변한다. 전순(氈盾)이 없으면 혈판을 지탱하는 힘이 없으므로 폭우시에 당판의 토사가 흘러내릴 위험성이 많다. 가끔 큰 비가 온 후 토사가 흘러내려 보기에도 매우 흉칙한 묘지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렇게 혈을 이루는 조건이 만족되고 나면 그 다음으로 부가되는 요소가 좌청룡, 우백호, 안산, 조산(朝山) 등 4가지 요소이다. 5악이 고루 갖춰진 혈이라면 이 4가지 요소는 없어도 무방하며, 비록 한두 가지 요소가 미비되어도 좋다고 하겠으니 이는 자신의 몸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적인 혈을 구했다면 사자(死者)를 매장할 정좌(正坐)를 찾아야 한다. 그림 127을 보면 입수와 선익, 혈판, 전순이 그려져 있지만 실제 눈으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입수와 혈판 그리고 전순이며, 선익은 지면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기에 혜안이 아니면 그의 존재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올바른 풍수(堪輿家)와 저질풍수의 차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혜안을 갖지 못한 풍수 선생은 정확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파헤쳐 보기도 하며 방향도 이리 놓았다가 저리 놓았다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쩌다 만에 하나 실수로 정확한 자리를 찾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잘못된 지점을 점지하고마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어떠한 실수를 저질러 놓았는지 한번 살펴보자. 혈판으로는 양 선익 사이로 입수를 지나온 기맥(①)이 전순 쪽으로 흐른다. 기맥은 물(水)을 만나면 진행하기를 멈추는 성질을 갖고 있기에 어느 혈판이건 기맥을 차단하는 수맥(②)이 가로쳐져 있기 마련이다(간혹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자(死者)를 모시는 정좌는 양 선익 아랫부분과 수맥의 윗부분의 중간지점(③)이 된다. 바로 이곳이 기가 응집되어 있는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을 덧붙인다면 계란의 노른자 위에 해당되는 장소라 하겠다(그림49). 그러나 이와 같은 기맥의 존재를 헤아리지 못하는 까막눈의 풍수 선생은 잘못된 논리를 주장하며 입수를 파괴하면서까지 우격다짐으로 사자를 매장하거나(그림 129의 ①) 수맥 위에 버젓이 사자를 매장하는(그림 129의②) 실수를 저지르며, 기맥을 찾지도 못하고 옆에다 자리를 정하곤 한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좋은 자리를 흉지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렇듯 길지에서 좋은 자리는 고스란히 남겨놓고 흉한 지점만 골라서 묘를 쓴 곳이 상상 외로 많이 발견된다. 봉분을 덮어둔 잔디는 어디론지 날려가고 속살이 벌겋게 드러난 경우도 있으며, 발길이 끊겼는지 아예 봉분이 납작해진 경우도 있고, 못된 놈 엉덩이에 뿔난 격으로 봉분 위로 수십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나무가 서있는 경우도 목격된다. 정좌에서 불과 두세 발자국만 떨어져 묘를 쓴 결과는 이렇게도 참담하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아보자. 다행히 제자리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여유공간이 있을 경우에는 올바른 선생님〔堪輿家〕의 지도하에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 이장한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겠지만, 마구잡이식으로 파헤쳐서 제자리가 파괴된 경우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다른 좋은 산을 구입해서 이장하거나 아니면 화장(火葬)하는 편이 도리어 속편하다. 화장을 권하는 것은 흉지에 묘를 쓰고 고통을 받느니, 선인(先人)도 하루빨리 자연으로 돌아가고 파괴된 자연도 원상복구되기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리도 찾지 못하는 주제에 목구멍에 거미줄 쳐지는 것이 두려워 화장을 극구 반대하는 풍수 선생은 20세기가 끝나기 전이라도 일선에서 물러나든지 전업하는 편이 현명한 처세가 아닐까 한다.

그림50-1, 50-2. 입수를 파괴하면서 사자를 매장하거나 수맥 위에 사자를 매장한 나쁜 자리 배치.

5.묘지난의 해결책인 납골당(納骨堂), 그러나 아무 곳에다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묘지로 뒤덮일 날이 머지 않았다. 매스컴에서는 묘지난을 단골 메뉴로 부각시키며 경종을 울려대지만 매장풍습이 몸에 밴 탓인지 지금도 무수히 많은 묘지가 마치 머리에 부스럼이 난 것처럼 산자락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공동묘지도 미리 예약을 해놓아야 할 정도로 포화상태이며, 개인 산이나 문중 산 심지어는 국유림까지도 발에 걷어채이는 것이 묘지인 것이 현실이다. 후손들에게 금수강산도 아닌 북망산천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사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납골당이 현재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크기에 따라서 수 기에서 수십 기의 묘가 차지하는 엄청난 넓이를 하나의 납골당만으로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상을 한 장소에 모시기 때문에 실묘(失墓)의 염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을 찾아 헤메는 수고도 덜어질 것이며 앞으로의 묘지난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과연 납골당은 어디에다 만들어야 되는지 알아보자. 납골당에는 육탈된 유골만 모시는 경우가 있겠으며 화장한 뼛가루 상태로 모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화장하고 난 한 줌의 재를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납골당 속에 모신다면 이는 크기만 축소된 상태로 돌아가신 이의 육체를 땅에다 매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납골당은 아무 곳에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취지는 좋지만 자리를 잘못 정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망지에 한 분이나 두 분을 합장했을 경우에는 극소수의 피해를 야기시키지만 수십 분을 모신 납골당을 망지에 만들었다면 그들의 자손들이 받는 고통은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납골당을 세울 자리도 정성들여서 찾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 128과 같이 다행히 명당〔穴〕을 구했다면 정확한 제자리를 찾아 만드는 것이 마땅하며, 그림 129-1이나 129-2와 같이 자리를 잘못 잡는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만약 혈이 있는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다면 기맥이 흐르는 곳을 찾아 양지바르고 건수(乾水)가 차지 않으며 수맥이 없는 곳에 납골당을 만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