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은 석불의 일종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낭떠러지나 큰 돌에 불상 등을 음각이나 부조(浮彫)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작은 돌에 새기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돌 전체를 깎아 후광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대부분 마애불로 칭하지 않으나 일부만 깎아 자연석이 남은 경우는 마애불로 칭하는 경우도 있어 경계점이 모호하기도 하다. 학자에 따라 광배가 전체적인 바위로 되어 있을 경우에 대해 마애불로 칭하자는 주장도 한다.
마애불의 대부분은 석굴사원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동굴을 보통의 사원처럼 파내기도 하였다. 한국의 마애불은 석굴사원이 적지만 인도나 중국은 대부분 석굴사원형식이다. 한국은 석굴사원 형식이 아니라 평면적인 바위에 새긴 경우가 많으며 때때로 석굴사원의 축소형이라 할 수 있는 감실이 나타나기도 한다.
석굴사원 형식의 마애불 형식은 인도에서는 BC 3세기부터 있었고, 아잔타석굴 등이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서도 거상(巨像)은 거의 마애상이다. 최근 종교간 갈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대형 석불들이 회교도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세계문화유산의 유지와 관리, 보전의 차원에서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중국은 석굴문화의 꽃을 피웠다. 4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진 둔황[敦煌(돈황)]의 천불동(千佛洞)을 비롯한 마이지산[麥積山(맥적산)], 윈강[雲崗(운강)], 룽먼[龍門(용문)]석굴 등 주로 북위(北魏)시대에서 수·당(隋唐)시대까지의 석굴이 알려져 있다. 대부분 실크로드와 연관이 있거나 실크로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인도와 티벳을 거쳐 지금의 신강웨이구르방향으로 진입하며 발달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동굴석불은 중국 한족의 문화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위그르, 인도, 티벳의 문화라고 극단적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그 후에야 순수한 중국의 마애불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중국과의 교류로 마애불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며 중국의 마애불 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지역, 특히 서산과 태안에서 먼저 마애불 조성이 발달하여 서산(瑞山)마애삼존불상, 태안(泰安)마애삼존불이 조성되었다. 이 마애불들은 그 조각수법과 시대적 역사성으로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다.
마애불의 꽃은 역시 경주 남산이라 할 것이다. 경주 남산은 한국 마애불의 20% 이상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지만 반드시는 아니고 그 정도로 많은 양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단석산신선사(斷石山神仙寺)마애불상군, 경주남산탑곡(慶州南山塔谷)마애불상군등이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한국은 전국적으로 많은 마애불이 분포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고 할 수 있는 증거다. 법주사(法住寺)마애여래상, 북한산구기동(北漢山舊基洞)마애석가여래좌상, 파주용미리(坡州龍尾里)석불입상, 대흥사북미륵암(大興寺北彌勒庵)마애여래좌상 등 전국적으로 많은 마애불이 남아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최근까지 마애불의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거나 문화재로 지정된 것, 널리 알려진 마애불은 무려 200여기가 넘는다. 그러나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약 2000여기에 이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마애불이 전국적으로 산재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판단할 때 마애불은 지극히 종교적인 문제고 종교적 관점으로 조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기복신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사찰이 종교적 관점과 국가적 사업으로 건설이 추진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때로 왕실의 안녕을 빌거나 비보풍수의 개념으로 지어지듯 마애불도 비보풍수의 개념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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