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마찬가지로 물이 고여 있는 곳을 통칭하지만 호수와 다른 점은 규모가 작은 경우에 사용되며, 샘이 나거나 물이 흘러들어 이루어진 자연호소(湖沼)인 경우에도 일부 사용되지만 인공으로 만들어진 호수인 인공저수지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 연못이라 하면 사람이 논에 물을 대거나 관상용으로 만든 작은 규모를 일러 말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저수지라고 하면 큰 규모의 인공 연못을 말하고 연못이라 하면 작은 규모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아시아에서는 큰 강에 딸린 물이 고인 곳은 못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로이 호(湖)라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름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호수와 인공으로 만든 연못과 비교된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관상용으로 만든 연못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중국의 명(明), 청(淸)나라 때는 자연 풍치를 살린 원림(園林)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었다. 못을 파고 풍취를 위해 나무를 기르고 작은 누각을 세우는 형식이다. 한국에도 호남지역에 몇 개의 원림이 남아 있는데 이는 양반들의 전형적인 연못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중국과 다르지 않아 규모가 큰 것에서 부터 주택의 앞뜰에 기묘하게 생긴 바위를 배치한 작은 것까지 여러 형태다. 논농사를 많이 짓는 아시아에서는 연못이 농촌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여기에 관한 많은 종교의례와 전설이 있다. 한국에서 연못의 기원은 관개경작과 연관이 있는데,《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연못을 관개에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형의 관계시설은 제(堤), 혹은 지(池)라고 불렀다. 따라서 김제의 벽골제와 제천의 의림지와 같은 관계 시설이 일찍부터 도입되었지만 이와 같은 규모의 큰 호수는 저수지라 불렀고 가내, 혹은 장원내의 작은 물 저수시설은 연못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내나 장원 내부가 아니라 마을이나 논 옆, 그리고 소규모 관개시설일 경우에도 연못이라 불렀다. 한국의 영향을 받았던 고대 일본에서도 연못의 축조에는 기술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방호(防護)와 식수를 위한 군사시설 및 양어장 등 다목적 연못을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사원의 경내에는 계곡이 포함되거나 계곡이 없을 경우에는 승인들이 목욕하기 위한 연못이 있었고 신라와 고려, 조선을 이어오며 왕궁에는 반드시 큰 연못을 만들어서 왕권의 신성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또한 권위와 휴식, 그리고 경치와 풍수적 이유로 궁궐 내에도 연못을 만들었다. 특히 경복궁 같은 경우에는 풍수적으로 관악산이 화형산(火形山)이기 때문에 불을 제압하고 화마(火魔)에 대응하기 위해 해태상(海態像)을 세우는 등의 풍수적 장치를 마련하고 궁궐 내에도 연못을 파서 대비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관상을 위하여 꾸며지는 못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연못은 백제의 진사왕이 391년에 한산성 안에 파서 가꾸었다는 못이다. 몰른 이 당시에는 꼭 꼬집어서 연못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단지 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이다. 이 당시에 이미 궁궐이나 성 내부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므로 못은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에 앞서 왕궁을 축조하면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미 이당시부터 궁궐의 필수 조건으로 연못이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풍취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일정 지역으로 둘러쌓인 담 안의 수분 조절을 위해서도 연못은 필요했다. 또 500년 백제 동성왕이 공산성 안에 못을 파서 놀이터로 삼았으며, 634년 무왕은 부여(扶餘) 남쪽에 모후를 위한 궁을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팠는데 오늘날 궁남지라 전해진다. 신라는 674년(문무왕 14) 반월성 밖에 큰 연못을 꾸며 놓았는데 오늘날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고대 역사를 장식하는 삼국이 모두 궁궐안팎에 연못을 파 두었다는 점은 이미 연못이 궁궐에서 중요한 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번성함에 따라 절이 많이 지어졌는데 절마다 연못이 만들어졌다. 현재도 절 내부에는 연못이 조성된 경우가 많다. 일부 절은 외부에 연못을 파 연꽃을 기르고 계곡의 물을 끌어 절 안으로 물이 흘러들게 하기도 한다. 절은 이와 같이 조성한 연못에 불교의 상징이라 고 할 수 있는 연꽃을 피웠다. 이러한 풍습이 민간에 퍼져 일반 저택의 정원에도 연못을 꾸미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이와 같이 연꽃을 키우면서 연못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민간주택의 꾸밈새가 기존의 고려시대와 달라졌다. 양반 가옥들이 口자형 또는 二자형으로 바뀌고 규모 또한 점차적으로 커지면서 내원과 외원으로 나뉘어 2개의 못을 만들었다. 양반가옥의 경우에는 내부에 가족만을 위한 연못을 꾸몄지만 일반 민초들은 가문 내부에 연못을 꾸밀 능력이나 제도적 지원이 되지 않았으므로 마을 중앙이나 마을 외곽의 논밭 부근에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매우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민초들이 마을 공동으로 만든 연못에는 잉어나 붕어, 가물치를 길렀으며 한여름에는 더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이 연못의 고기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둘러 앉아 천렵을 하는 방식으로 이용하였다. 궁궐의 경우 주로 후원에 못이 꾸며져 놀이를 위한 자리로 쓰였으나 경복궁의 경회루지(慶會樓池)와 향원지(香遠池)처럼 후원이 아닌 곳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궁궐의 후원은 자연을 그대로 살려 골짜기를 따라 물이 홀러드는 자리에 못을 파고 물가에 정자나 당(堂)을 세웠다. 비원의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반도지(半島池)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연못의 유형을 보면, 물가의 선이 자연스럽게 굴곡한 것으로 넓은 자리에 만들어진 곡지와 비교적 협소한 자리에 네모반듯하게 직선형으로 꾸며진 방지의 2가지 형태가 있다. 연못은 단순히 관상용으로만 이용된 것은 아니다. 논밭에 물을 대는 관개기설로 이용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마을에 연못을 파기도 하였다. 특히 마을 앞에 화형산이 자리하고 있거나 큰 바위가 있을 때는 마을 내부에 연못을 파서 비보풍수를 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주변 경치가 뛰어나면 연못을 파서 아침 저녁으로 연못에 주변 풍취가 비추어지도록 하였다. 음택에서도 작은 연못이 이용되었다. 흔히 명당에 모셔진 묘하의 우물은 명당수로 지칭되었다. 특히 풍수지리에서 물은 재산으로 인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조상의 묘하에 우물을 파서 후손들이 부귀를 누리도록 축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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