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묘 (墳墓)
--- 야후 코리아의 사전을 참고하였슴!
분묘는 풍수지리를 익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물론 분묘가 풍수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현재는 음택이라고 불리며 풍수의 정점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풍수지리는 크게 양택과 음택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한국의 풍수지리에서 음택이 지나치게 강조된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다. 분묘란 사람의 유해나 육탈이 이루어진 다음 유골을 묻는 장소로서 묘(墓), 분묘(墳墓)라고도 한다. 흔히 산소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말은 분묘가 산에 있음을 알리는 말이며 무덤이라는 말이 일반적이다. 무덤은 사체나 유골을 묻는 장소임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제사를 위한 구조물로 상석과 향로석, 혼유석 등이 구비되어 있다. 시신을 화장할 경우에는 화장터라 불리고 무덤과 구별되며 사원 등에 설치된 위패당(位牌堂)이나 영묘(靈廟), 가정에서 모시는 불단(佛壇), 최근 급격하게 늘고 있는 납골당이 제사를 위한 것이지만 무덤이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일부에서는 납골묘(納骨墓)라고 부르며 무덤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풍수적 관점으로 보아 무덤은 조상의 유골이 있어야 한다. 사체나 유골을 불에 태워 갈아 만든 한국의 납골묘는 납골묘가 아니라 납분묘(納粉墓)라 불러야 하며 무덤이라 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무덤이라면 유골이 매장되어야 한다. 무덤은 세계적인 매장문화형태로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무덤은 각각의 민족이 지니는 생명관이나 내세관 등 종교와 문화성을 반영하고 시대와 계층, 종교에 따라 다르거나 변하고, 민족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그 바탕으로 하지만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제강압시기에 대량으로 도입된 공동묘지와 새마을 운동 이후 도입된 가족묘,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는 납골당이 이에 속한다. 무덤은 민족이나 나라, 그리고 사회의 장제(葬制)나 종교적 이념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자연환경과 생업형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기본적인 바탕위에 피매장자의 연령과 성별,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시대가 변천하며 외래문화의 유입과 과학적 기술의 발달, 그리고 사회이념의 변화와 지위에 따라 매장의 문화와 형태, 규모가 영향을 받는다. 무덤의 형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여 일개 지역의 문화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역사는 기록시대 이전이다. 무덤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매장시설로 빌견된 것은 프랑스의 라 페라시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청동기시대 이후의 무덤은 발견된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토장묘(土葬墓)가 기본이며 토광묘(土壙墓)와 고인돌, 석관묘(石棺墓)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는 기존의 토템적 사고에서 종교적으로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불교의 융성으로 화장이 성행하여 화장묘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부도(浮屠)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이나 부도는 무덤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대로부터 이 땅에 피어난 문화로서의 토착 풍수를 기반으로 하여,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신라시대에 중국에서 풍수이론이 이입되었다. 토착풍수와 이입된 풍수는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여지는데 신라말의 도선국사는 중국의 풍수를 문자로 도입한 역할을 하였다. 고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풍수지리는 음택보다 양택이 발달한 것으로 보여진다. 동시에 기(氣)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론의 도입으로 한편으로는 화장과 함께 무덤의 축조도 병행되었는데, 초기에 축조된 왕릉은 원형봉토분들이었으며 매우 규모가 컸으나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작아졌다. 고려시대에는 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이 가장 주류를 이루었고 이후 회곽묘(灰槨墓) 등이 나타나고 화장도 병행되었다. 이후 원형묘와 직사각형의 토총이 주류를 이루었고 나중에는 직사각형에 장대석을 두르는 형식이 나타났다. 이 형식은 조선초까지 이어진다. 고려시대 무덤의 특징은 풍수사상이 철저히 지켜졌고 이후 조선의 매장문화에서 보여지는 발복이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시대 무덤은 거대한 돌널무덤의 형태로 변하며 화장의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이는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유교의 이론에 따라 조상숭배와 발복이론에 따라 양택의 기능이 축소되고 음택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양반의 가옥이나 궁궐 축조, 묘가 사라지고 중국식 널무덤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다. 묘를 쓰는 데 있어 풍수사상이 더욱 보편화되었고 조선 중엽 이후에는 풍수를 무시하고는 무덤을 쓰지 못할 정도로 저변에 널리 퍼졌다. 무덥은 초기의 원형, 직사각형에서 중기 이후에는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하고 묘비가 일반화되었다. 개항 이후의 무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 매장법을 계승하여 원형널무덤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풍수의 수난시대였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이를 위한 정책으로 조선의 풍수를 이용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한 많은 비행을 저질렀으며 산소 또한 공동묘지를 도입하였다. 특히 공동묘지는 골짜기와 같은 망지를 이용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와 같은 일본 정책의 여파가 남아있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널무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탈관을 하고 있다. 묘를 쓰는 데 있어서도 공원묘지 등이 적극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풍수지리의 이법에 따라 매장문화를 선호하며 대단위 공동묘지 사업이 전개되고 일부에서는 공동묘지도 화장이 병행되고 있다. 2000년을 전후로 하여 화장문화가 도입되어 남골문화가 발달하였으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다음의 화장문화는 흉물스러운 문화로 변해가고 있는데 이는 관리와 자연의 조화를 무시한 석조의 구조 때문으로 보여진다. 최근에는 화장을 하여 나무 밑에 묻어주는 수목장과 같은 문화가 도입되고 있다. 한국의 매장 문화에 따른 무덤은 원시가족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태동하여 한국의 지형에 맞는 구조를 지니고 발전했으며 삼국시대까지 한국 고유의 토종 풍수이법에 따라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삼국시대 중기 이후 중국에서 이입된 외래 문화의 유입이 영향을 미치고 제도와 사상, 풍습 등이 융합되면서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는데, 그 바탕이 풍수지리라는 학문이다. 조선 중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매장문화와 무덤은 한국인의 문화와 조상숭배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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