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비보사찰, 회룡사
회룡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신라 때 초창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서로 다른 주장이 전해지고 있다.
1977년 봉선사에서 발행한 <봉선사본말사약지>에는 절이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되어 법성사(法性寺)라고 불려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서는 의상이 도봉산에 법성사라는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후대에 세워진 국내의 여러 절들이 의상이나 원효, 또는 도선 등을 창건주로 받드는 것은 절의 유래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듯하다.
회룡사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창건주를 신라 통일 초기의 고승인 의상으로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므로 절에서 주장하고 있는 의상에 의한 창건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의상의 창건 이후의 역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930년(경순왕 3)에 동진(洞眞)국사가 재창하고 1070(문종 24)에 혜거(慧炬)국사가 3창하였으며, 1384년(우왕 10)에 무학대사가 4창하고 1034년(태종 3)에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되어 있다.
절을 재창하였다는 동진대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 승려로서 그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회룡사와의 관련 사실은 비문에 보이지 않는다. 동진 경보(慶甫, 868~948)는 영암 출신으로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821~898)의 제자다. 동진대사는 중국에 유학하여 조동종(曹洞宗)을 국내로 들여왔고 후백제 견훤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고,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와 혜종, 정종의 귀의를 받기도 하였다. 만약 회룡사가 동진 경보에 의하여 재창된 것이 사실이라면 절은 의상에 의해 화엄 사찰로 출발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종 사찰로 그 성격이 바뀐 셈이 된다. 그러나 동진에 의한 재창설 역시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고려 문종 때 절을 3창하였다는 혜거 역시 망월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광종 때 영국사(寧國寺)에 머물던 법안종 계통의 승려로 짐작되고 있다.
광종 때의 혜거국사가 회룡사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절의 기록에는 문종 때라고 하고 있어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니까 회룡사와 관련된 무학대사 이전의 사실은 모두 사찰의 기록 그대로를 믿기에는 망설여지는 면이 많다고 하겠다.
권상로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 하권의 회룡사항에는 한결같이 무학대사에 의하여 1984년(우왕 10) 또는 1395년(태조 4)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 기록은 그대로 믿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중동국여지승람> 권11의 양주목 불우(佛宇)조에 망월사, 영국사 등과 함께 도봉산에 있는 절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절의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1398년(태조 7)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있던 왕사 무학을 방문했다.
무학은 1394년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이곳 토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 때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881년(고종 18)에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에 전하고 있다. 이와는 연대는 달리하여 함흥에 내려가 있던 태조가 1403년(태종 3)에 환궁한 뒤 이곳에 있던 무학을 찾아 왔으므로 무학대사가 태조의 환궁을 기뻐하여 회룡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이와는 달리 1384년(우왕 10)에 이곳 도봉산에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했는데, 이성계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성이 가까이 있는 무학골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 라는 직책을 맡고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와서 무학을 찾아보고 절 이름을 회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회룡사는 회룡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회룡역에서 호원동 한국아파트 방향으로 좁은 길목을 따라 가면 서부외곽순환도로 밑으로 좌측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매표소를 지나 계속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회룡사가 나타난다.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 회룡사 입구 우측의 부도 3기다. 이곳은 바위위에 부도가 놓여 있는데 비구니의 부도이며 기맥이 강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풍수를 배우는 학인으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종루 밑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7호(2003.4.21)로 지정된 회룡사 석조가 있다.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으로 제작되었다. 이 석조는 전체 길이 224cm, 폭 153cm, 깊이 67cm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데, 현존하는 석조 중 대형에 속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6호(2003.4.21)회룡사5층석탑은 기단위에 오층탑신을 올린 높이 3.3m 규모의 일반형석탑이다.
회룡사신중도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8호(2003.4.21)로 지정되어 있으나 촬영은 할 수 없다.
회룡사는 특징이 있다. 우선 주산에서 내려온 한 줄기 주맥이 당우들이 들어차 있는 절터를 에워싸고 빙 둘러쳐진 형상인데 물이 환포를 하지는 못했지만 바닥의 돌에 막혀 충이 방어된 상태이며 주맥은 소가 누운 듯한 형상을 지니고 있어 전형적인 와우형 지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우들이 자리한 곳을 살펴보면 각각의 지각이 끝나는 지점이라 기맥의 여력을 느낄수 있다.
도봉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은 매우 깊고 거칠다. 평소에는 그리 거칠지 않을 수 있으나 장마철이 되면 계곡이 물이 넘쳐 산 아래의 마을이 심한 피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보아 회룡사는 여러 가지 목적 중에서도 부처님의 원력으로 피해를 막아보자는 비보사찰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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