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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 강북구 삼성암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2-08 조회수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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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나한기도도량 삼성암

서울시 강북구 수유1동 488번지 삼각산에 있는 삼성암(三聖庵)은 누구나 인정하는 나한기도도량이며, 또한 대표하는 독성기도도량이다. 독성기도도량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화계사 보국문 쪽으로 난 정겨운 길을 타고 700m쯤 올라가면,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삼성암을 만나게 된다. 물론 화계사에서 산길을 따라 갈 수도 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독성(獨聖)의 상주처로 이름난 삼성암은 대웅전을 가운데에 두고, 독성각과 칠성각이 좌우에 각각 자리한 아담한 형태다. 높은 바위벽이 병풍처럼 암자 뒤에 둘러있고, 세 개의 산봉우리가 형제처럼 암자를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기도도량이다.

고상진(高尙鎭) 거사가 1872년 창건하고 이름은 ‘소난야’(小蘭若)라고 했다. 삼성암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緣起)가 전한다. 한양에 살던 박선묵(朴銑默) 거사는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했다. 박거사는 유성종(劉聖鍾)·서윤구(徐潤龜)·고상진(高尙鎭)·이원기(李元基)·장윤구(張潤九)·유재호(劉在護) 등 7인의 신도와 함께 1870년 봄, 현재의 사찰이 있는 천태굴에서 3일 동안 독성기도를 봉행했다.

정성을 다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박선묵 거사가 고상진 거사에게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좋을 것”이라며, 창건을 제안했다. 창건을 논의한 몇 년 뒤, 기도했던 그곳에 고상진 거사가 1872년 봄 여러 칸의 정사(精舍)를 짓고, 이름을 작은 절이라는 뜻에서 ‘소난야’로 명명했다.

창사 이후 부근의 산지를 매입해 사격(寺格)을 점차 넓혔다. 10년이 지난 뒤인 1881년, 박선묵 거사가 독성각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지금의 삼성암(三聖庵)으로 바꾸었다. 창건 후 조용히 사세(寺勢)를 확장하던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스님이 한양의 신도 김용태(金容泰) 거사의 시주를 얻어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놓았으며, 요사를 수선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사찰의 위용을 새롭게 갖추었다.

1942년 7월 폭우로 인한 산사태에 절이 무너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스님이 중창의 뜻을 냈다. 중창을 위한 권선을 하던 중 김용태 거사로부터 목재를 시주받고, 삼성암의 박중현(朴重玄)스님과 김성섭(金性攝)스님, 그리고 인근 사찰 및 신도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인 1943년 3월에 대방 등 12칸을 준공할 수 있었다. 중창 공사 뒤 사찰의 당우가 전에 비해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사찰의 면모를 일신한 1943년 3월, 금화산인(金華山人) 김태흡(金泰洽)스님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華溪寺三聖庵重建記)〉를 지었는데, 현재까지 그 내용이 전해온다.

그해 7월엔 청송혜운(靑松慧雲)스님이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지금의 가람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1961년부터 본공(本空)스님·세민(世敏)스님(현해인사 주지)·법보스님(현 주지)의 노력으로 중건되고 보수된 것이다. 세민스님이 주지를 맡은 이후에 대웅전을 고쳐 짓고, 범종루와 범종불사를 추진해 사찰 면모 일신시켰다. 현 주지 법보스님 역시 사찰 면모 일신에 강한 의욕을 보여, 지금의 삼성암이 되도록 노력했다.

풍수적으로는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계곡을 완전 복개하여 큰 터를 만든 다음 대웅전을 크게 짓고 요사채도 2층 건물로 시원하게 지어놓았다.
바라보면 대웅전 요사채가 보이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자리잡았다. 대웅전 앞의 요사채 정면 좌측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 밑에서 뻗어나온 기맥이 일주문이 자리한 기맥이다. 이 기맥의 중간은 주차장 앞인데 이 자리가 마치 방석처럼 펼쳐져 한 채의 당우를 지을 수 있을 넓이를 지니고 있다.

대웅전을 돌아보면 뒤쪽에 바위가 있다. 바위는 인작이 가해진 모습으로 아마 대웅전을 짓기 위해 일부 손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산에서 뻗어나온 산 줄기로 보아 대웅전 아래로는 기맥이 뻗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왼쪽 벽의 일부는 유리창을 달고 그 앞에 단을 설치하여 멀리 정면으로 독성각이 바라보이게 하였다.

대웅전 우측에는 독성각이 있다. 삼성암은 경북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성기도도량이다. 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혼자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수기를 부처님께 받고,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건물인 독성각의 정면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으며, 근래 조성된 독성탱이 봉안돼 있다. 그러나 출입이 제한되기도 한다.

삼성암의 독성각은 기도도량이다. 삼각산은 바위산으로 험산이지만 기맥이 강한 산이다. 바위는 기맥의 증거다.
기도라는 것은 염원이며 좋은 기운이 자신의 몸을 거쳐 기도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기감응의 이치가 우선이다. 종교를 믿는 신행자들에게 기도는 신행의 일부일 수 있지만 기원은 동기감을 바라는 일종의 행위다. 그런 목적이라면 기도도량은 많은 영험함을 보일 수 있으며 이 기준은 좋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독성각은 좋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신앙심과 좋은 기운이 합쳐지는 곳이니 좋은 기도처인 것이다. 이 같은 곳이 많은 곳은 부드러운 감을 주는 바위가 많은 곳이고 또 혈처다.

대웅전 좌측 옆으로 칠성각이 있다. 칠성각엔 성모각(聖母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주원영(朱源榮) 거사의 글씨다. 불교신문에 쓰여진 자료에 의하면 칠성각에 모셔진 산신탱화는 1908년 석옹 철유(石翁喆裕)스님이 출초(出草)하고, 두흠(斗欽)·윤오(允旿)스님 등의 화승(畵僧)이 참여해 삼각산 수국사에서 그려진 것을, 삼성암으로 옮겨왔다 한다.
계곡의 물이 벌어지는 곳에 자리한 칠성각은 만약 물이 불어나면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물이 흘러내리는 방향으로 칠성을 봉안한 것이다. 계곡물을 직선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하여 비보적인 대책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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