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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교동 한규설대감가(長橋洞韓圭卨大監家)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2-08 조회수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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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국민대에 자리를 옮긴 장교동 한규설대감가

성북지역은 옛부터 서울의 성외 지역으로 태조 5년(1396년) 한성부내 동부 숭인방과 인창방에 속하였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한성부, 즉 서울이라 하면 도성의 4대문 안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은 도성 밖 5리 내지 10리까지를 서울로 삼아 이를 성지 10리라고 일컬었다. 또 4산금표란 지도에도 서울의 범위를 동쪽은 중랑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 및 수유리 일대를 정하였음을 볼 때, 성북 전역은 옛부터 서울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융희 4년(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곧 이듬해 종래의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면서 지역이 축소되었으나 25년이 지난 1936년 4월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를 다시 확장함으로써 서울의 성외지역 중 경기도 고양군 등 일부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성북은 안암리, 성북리, 종암리, 돈암리, 신설리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일제가 이렇게 새로 편입된 동리명을 일제식 명칭인 정(町)으로 바꾸어 쓰다가 국권회복이 되자 우리는 1946년 10월에 우리의 고유명칭인 동(洞)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는 행정구역을 확장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의 새로 편입된 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지역을 합하여 서울시의 9번째 구로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성북구(城北區)다.

장교동 한규설대감가(長橋洞韓圭卨大監家)는 조선 말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 대감이 살던 저택이다. 애초부터 이곳 성북구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국민대 부지에 옮겨 조성되었다.

한규설대감가(長橋洞韓圭卨大監家)는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유지로 국민대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교동에 있던 것을 국민대학교 안에 새로 조성된 1,359평의 대지 위에 원형 그대로 이건하였다. 이건하면서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와 사이의 담도 복원하였다. 현재 국민대학교 생활관으로 쓰인다. 다원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한규설 대감가는 명원(茗園) 김미희(金美熙)여사의 도움으로 국민대학교에 이전하여 명원민속관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국민대학교 생활관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명원 김미희 여사의 다도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도 있는 아주 교육적인 곳이다.

이 건물의 주인은 한규설 대감이었다.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은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으로 부사 승렬(承烈)의 아들로 서울 출생이다. 무과(武科)에 등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 판윤(判尹)을 거쳐 포도대장장위사(壯衛使) 의정부 찬성(贊成)을 역임, 1905년(광무 9)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어 내각(內閣)을 조직하였으나, 이해 을사조약 체결에서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각료(閣僚)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贊否)를 물을 때 끝까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조약이 체결된 후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때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男爵)이 되었으나 거절하였다. 그 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켰다.

이 가옥은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교동에 있을 때에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가 넓은 대지 위에 있었다.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없어졌던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를 복원하였고, 본래는 있었으나 철거된 중문간(間) 행랑채와 사잇담도 복원하였다.

서울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국민대학교 켐퍼스와 약간 분리된 지역이라 관람이 용이하다. 들어서면 안채에는 안방 3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건넌방 2칸이 자리 잡고, ㄱ자로 꺾인 부엌과 찬방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겹처마이며 전면은 굴도리이나 후면은 납도리이고 전후면 모두 소로받침을 하고 있다.

건물을 논하자면 한권의 책이 부족할 것이다.전체적으로 본체와 사랑체, 그리고 행랑으로 구별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각각의 공간분할을 이루고 있다. 사방을 둘러친 담이 가리고 있으므로 곽(廓)으로 분류할 수 있어 문(門)과 주(主)의 위치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장 눈여겨 볼 것은 이 건물이 옮겨온 자리다. 장교동의 현재 위치는 알려져 있지만 부지의 형태는 변했을 것이므로 논하지 말고 현재의 위치만을 논하자면 매우 중요하고 관산지로 충분한 가능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대감가를 찾아 올라가는 중에 바라보면 건물이 마치 언덕위에 놓여진 것처럼 등실 떠있다. 다가가 살펴보면 뒤로는 많은 집들과 국민대가 차지하고 있지만 산의 줄기가 확연하게 다가오고 둥굴 넙적한 자리에 건물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 앞을 살펴보면 새로 지은 정자와 초가정자가 있는데 그 부분이 전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우측으로 치우처진 산줄기는 길게 뻗어있고 솟을 삼문 방향으로 지나치게 큰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잉혈의 혈상이다.

혈판은 음택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양택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예를 들면 경주 양동마을의 명가들은 양택지로 혈판을 택했는데 회제 이언적의 출생지가 그러한 경우다.

눈야겨 볼 것은 건물이 자리한 터와 국민대 건물 사이에 길이 뚫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가옥 뒤에 길이 열리면 매우 불길하게 본다. 이는 풍수에서 길은 물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혈판이 이루어져 묘를 썼다면 바로 뒤로 길이 나는 것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양택에서는 음택보다 그 경우가 덜하다.

중요한 것은 길이 열리며 기맥을 끊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길을 내면 단산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단산은 산맥을 자르면 기맥도 잘린다는 것으로 기맥이 끊어지면 묘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오대불가장지(五大不可葬地)에 단산(斷山)이 포함되는데 과거와 달리 현재는 매우 중요하게 살펴야 한다. 이는 현대 문명의 발달로 기계들이 대량으로 등장하여 기맥을 끊을 수 있는 여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단산이 되었는지, 길을 내었음에도 기맥이 살아있는지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맥은 일정한 깊이에서 흐르는 것으로 거죽을 깎아내었다고 기맥이 그치거나 끊기는 것은 아니다. 지형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르다. 바위산이나 산정은 기매이 지표와 가깝게 올라오고 육산과 계곡은 기 기맥이 깊다. 따라서 기맥의 끊김을 느낄 수 있는 기맥 공부와 기를 느낄 수 있는 마음수양이 중요하다.

한규설 대감가가 혈판에 자리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로 길이 열려 있다. 그럼 맥이 끊기고 기가 잘린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면 기맥의 높이가 예측되고 지표가 그다지 깎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맥이 끊어졌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단지 국민대 안쪽의 기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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