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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괴산 칠충사와 피세정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2-08 조회수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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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칠충사와 피세정에서 세상을 본다

문광면(文光面)은 충청북도 괴산군 중앙부에 있는 면소재지로 동쪽으로 칠성면(七星面), 남쪽으로 청천면(靑川面), 북쪽으로 괴산읍, 서쪽으로 사리면(沙梨面) 청안면(淸安面)과 접한다. 배미산과 장자봉 등 200~500m의 저산성 구릉지가 넓게 분포하며, 달천(達川)의 지류인 성황천(城皇川)과 광덕천(光德川) 유역은 좁은 평야를 이루어 쌀과 보리 등 주곡작물이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괴산청결고추가 유명하며 절임배추 판매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관통하여 괴산읍과 청주시 방면으로 연결된다.

문광면의 문화재로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7호인 칠충사(七忠祠), 피세정(避世亭), 매죽정(梅竹亭) 신기리 사지(新基里寺址), 야미산성(夜味山城) 등이 있다. 풍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기라면 반드시 피세정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칠충사(七忠祠)는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에 있는 순창조씨 출신의 칠충신을 모신 사당으로 충북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산94번지에 있으며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배향되어 있는 칠충신은 《괴산군삼강록(槐山郡三綱錄)》에 기록되어 있는 조신(趙紳) 조종(趙悰) 조복(趙服) 조반 조덕공(趙德恭) 조덕용(趙德容)조은이다. 1972년부터 순창조씨 문중이 주축이 된 괴산 유림회(儒林會)가 칠충신의 사적록(事蹟錄)을 만드는 등의 추모사업을 추진하여 1973년에는 칠충각(七忠閣)을 짓고 1975년에는 칠충사를 건립하였다.

칠충사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경사진 비포장 도로를 약 100m 들어가면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올린 칠충각이 있고 왼쪽 자연경사를 따라 설치된 석조계단을 오르면 외삼문(外三門)과 담장을 친 칠충사가 있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익공집이다.

칠충사 근처의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는 피세정(避世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칠충신의 한 사람인 조신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곳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칠충각 안에는 忠節高麗國子進士麗亡不事二君大明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避世遯于槐山松坪隱逸趙紳之閭 등 7인의 정려 현판이 있다.

순창 조씨(淳昌趙氏)의 시조 조자장은 고려 초에 순창에서 호장을 지냈다. 그 후 대대로 호장을 지내면서 가문을 이어 오다가 5세 인평이 1177년(명종7) 망이 망소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금오위상장군이 되면서 기반을 굳혔다. 그 후 6세 광명이 문하시랑평장사, 7세 문정이 좌우위대호군, 8세 겸이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다시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 밀직사사 등을 역임하였고 겸의 아들 봉이 판도판서로 순성군에 봉해지는 등 조상의 발상지인 순창을 본관으로 하고 여러 파로 나누어 전국 일원에 번성했다.

피세정은 칠충사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세워진 정자로 한눈에 보아도 우뚝 솟은 산이 제법 고즈녁하고 고집스럽게 보인다. 옆으로는 보은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길게 나있다. 칠충사에 이르러 들어가기 전에 국도변에 높이 떠 있는 듯 보이는 한채의 누정을 볼 수 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이 누정은 가파르게 보이는 산 위에 있지만 막상 소나무 사이로 난 길을 오르기는 어렵지 않다.

피세정은 고려시대에 지어졌지만 수차레 멸실된 것을 재건한 누각으로 현재는 미지정 문화재로 있지만 조상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지는 곳이며 누정이라는 것이 관리가 소홀해지면 쉽게 부서지거나 무너지는 습성이 있다. 현재는 순창 조씨 문중에서 관리하므로 원형을 유지하며 깨끗하고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다.

피세정은 순창조씨(淳昌趙氏) 피세공(避世公) 조신(趙紳)이 1392년에 창건한 정자로 조신은 천성이 정직하고 문행이 탁월하여 그 명성이 현저한 고려말 국자 진사(國子 進士)로서 임신년(壬申年,1392) 이성계가 공양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을 개국하기에 이르자 충신과 열사중 72인은 두문동(杜門洞)으로 은거하고 조신은 괴산 송평으로 낙향하여 문광면 광덕리 오마산 자락에 정자를 짓고 일편단심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유서 깊은 정자로 피세정이란 현판을 게시하고 피세를 자신의 호로 삼아 한평생 은둔 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정자에는 충절의 뜻이 담긴 절구 한 수를 게시하고 백이 숙제의 절의를 본받아 이름과 몸을 숨기고 종신토록 이 정자에서 충절을 지키며 살았다.

피세정이 건립된지 오랜 세월이 지나 황량한 빈터만 남았는데 이곳을 지나게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本貫, 漢陽(1482-1519) 副提學, 大司憲, 歷任 己卯士禍 때 流配 賜死)는 정자터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두수의 詩로 피세옹을 추모한바 있다.

避世亭留地

溪山分外奇

況有手澤在

先生昔居斯



物理隨 ??積

恢恢地有餘

觀今淸景溢

認昔大人居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자는 수차 훼손 되었으나 그때마다 후손들이 중건을 거듭하여 600여년간 보존 관리 하고 있다. 정자는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목조 기와집이며 마루주위에 평난간을 둘렀다

피세정에 오르면 주변을 살필 수가 있다. 피세정은 돌혈 위에 세웠다. 돌혈의 특징은 사유(四維)에 지각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유에 지각은 물론이고 경관도 좋다. 또 이 피세정에 올라 살펴보면 주변에 혈판이 이루어진 3개 혈을 볼 수가 있다. 풍수를 공부하며 이처럼 잘 보존되어 있는 혈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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