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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월 청령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2-08 조회수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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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청령포의 물소리는 서럽기만 하고

청령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있는 서강변의 물돌이동이다. 평창쪽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영월로 들어와 서강이 되었다. 이는 평창에서 내려오는 동강과 비견되는 이름으로 각기 동서를 맞춘 이름이다. 이 서강가에 청령포가 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도 영월은 단종애사를 빼놓고는 얘기 할 수 없는 고장이다. 영월 땅 그 숱한 단종의 유적지 중에서도 청령포는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청령포의 첫 인상은 지난 날 애처로운 사연으로 얼룩진 단종의 유배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속세를 떠난 왕가의 은거지라는 표현이 제 격에 맞을 법하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유배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소나무 숲이 있다. 청령포수림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청령포에 위치한 이 수림지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이 수림중에는 남송이라 불리우는 가장 큰 노송이 있는데 그 높이가 30여m나 되어 다른 노송보다 두배나 더 크며, 또 여송이라 불리우는 거송이 있는데 마치 裸女(나여)가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인데 나무의 북쪽은 엉덩이 모양을 하였고 남쪽은 흡사 음부처럼 생겼을 뿐만아니라 음문까지 자연적으로 생겨 있어 여송임을 입증하고 있다.

청령포엔 대낮에도 했빛이 들지 않을 만큼 소나무가 울창하다. 어소가 있는 부근도 예외는 아니다. 관음송을 찾았다. 관음송은 높이가 30여m, 가슴높이 둘레가 6m나 되는 600년생 거목이다. 이 소나무를 처절한 단종의 유배생활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고 피맺힌 울음소리를 들었을 터라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은 한이 맺힌 나무다.

관음송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5분 쯤 오르면 천길 낭떠러지 노산대에 이른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해질녘에 이곳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기던 곳이다.

지형을 살펴보면 3면은 깊은 강물에 둘러싸였고, 한면은 천길절벽이 높이 솟아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의 "창살없는 감옥"이다. 조선 6대 임금 단종은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이곳으로 유배 당했다. 여기에 갇힌 어린 임금은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기곤 했다.

용의 비늘처럼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내려오니 소나무 숲속에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이 비석에는「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금표비는 단종 유배시에 세웠다고 한다. 노산군에 대한 명백한 경고의 팻말인 것이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삼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인 것이다. 결국 어떤 일이 있어도 청령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남쪽으로 영조때 세운 端廟遺支碑(단묘유지비)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단묘유지비는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세우고 전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라 새기고 후면에는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 石」(황명숭정무진기행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오솔길 숲 속을 따라 50m사이에 비각이 있으니, 바로 이 장소가 홍수에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단종 거처임를 알리고 있다.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는 이미 사라졌지만 복원하여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석에는 단종재평부시유지 (端宗在平府時遺地)라 적혀있다. 그 옛날 노산군의 자취가 없어진 지금 새로이 복원한 어소는 그저 관광객을 맞이할 뿐으로 이 비각은 중요한 사료로 남아있다. 영조 30년에 세워진 이 어제비(御製碑)는 가끔 신통력을 나타내 후세인의 경배를 받고 있다고 전한다. 태백선 철도가 뒷산을 뚫을 때, 비석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강물도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서강 상류 현서면 관란정(觀瀾亭)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원호(元昊)가 표주박에 밥을 담아 흘려보내면, 단종이 이를 받아 먹고 문안 편지를 빈 그릇에 다시 담아 띄웠다 한다. 그러면 물길이 역류하여 단종의 소식을 전해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형을 살피고 육육봉(六六峯)을 찾는다. 육육봉은 청령포 바로 뒷산이다. 일명 刀山이라고도 하는데 청령포에서 솟아오른 암벽으로 된 이 산은 6개의 작은 봉을 이루고 있어 육육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령포는 동북서가 강이고 남쪽은 산인데 바로 이 산이 육육봉 이다.어찌 보면 톱날과 흡사하다.

단종의 한을 담고 있는 청령포는 풍수적으로 연화부수형에 해당한다. 보통 물태극 산태극이 이루어지는 곳에 연화부수형이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곳이 안동의 하회마을 이다.

하회마을은 기맥이 들어오는 곳이 명백하지만 청령포는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이 청령포에 기맥이 들어와 있으며 묘를 쓸 자리는 적합하지 않아도 혈장이 있다는 것이다. 관음송 부근에 혈장이 살아있고 기맥은 육육봉 방향 망향탑이 있는 봉우리 위에서 측면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거지든 음택지를 관산하든 중요한 것은 바로 기맥의 흐름이다. 형상을 이해하고 기맥을 찾을 수 있다면 풍수를 배우는 학인으로서의 기본은 갖추어진 것이다. 이마져도 알지 못하고 풍수를 논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땅속으로 흐르는 기맥을 알아내고 기맥의 흐름을 느끼는 수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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