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
한국 5대 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다. 법흥사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그리 볼 것이 없다. 그러나 적멸보궁은 볼만하다. 큰 바위산이 뒤를 기리고 있는데 만다라전이 보인다. 그 만다라전 사이로 길을 타고 올라가면 불과 500여미터 정도의 거리에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적멸보궁 뒤에는 마치 둔덕처럼 보이는 지형이 보이고 그 앞에는 탑이 잇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선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 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있으며 법흥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242호인 까막딱다구리가 서식한다.
본래 사자산 법흥사의 지명 유래는 산세가 불교의 상징 동물인 사자형상의 허리와 같은 모든 지혈이 한 곳에 모이는 길지 이며, 뒤의 산봉우리가 불교의 상징 꽃인 연꽃 같이 생긴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흥사에서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경승지 중 하나다. 사찰로 들어가는 오솔길의 소나무 숲이 장관이고, 사찰 앞에 줄줄이 이어진 아기자기한 아홉 개의 봉우리(구봉대) 역시 일품인 곳이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서기 643년 신라시대(신라 선덕여왕 12년)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당시 자장율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코자 중국으로 유학, 중국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님의 석상 앞에서 7일간 정진기도 끝에 마침내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전수 받아 이곳 해동국 사자산에 이르러 법흥사를 창건하고 이어 적멸보궁을 세우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후 사자산 법흥사는 서기 847년에 신라말의 선승인 도윤칠감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하여 이곳 사자산 법흥사에 선문을 개창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방대했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이어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선사에 이르러서 사자산문은 더욱 번창하여 전국의 선승들이 이곳 사자산 법흥사를 찾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도윤칠감국사와 징효절중선사는 당시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곳 사자산문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전 불교계와 조정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웅장했던 사자산 법흥사도 역사의 흐름, 세태의 부침에 따라 중창을 거듭하게 되었다. 서기 643년 신라시대 때 창건된 이래, 서기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그 후에도 1730년 조선 영조 6년(3創建), 1778년 조선 정조2년(4創建), 1845년 조선 헌종 11년(5創建), 1939년 임시정부 당시(6創建), 그리고 이번까지 무려 일곱 차례 중창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특히 여섯 번째 창건 때 씌어진 탄허대종사 친필 상량문이 적멸보궁 해체 때 나옴으로써 이곳 사자산 법흥사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지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금강문을 겸하는 원음루를 지나 경내 입구에서부터 올라가 200여미터를 지나면 수각이 나타나고 다시 3백미터쯤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법흥사 인근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는 쭉쭉 뻗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장관을 연출한다.
적멸보궁은 높고 긴 석축을 쌓아 넓은 대지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기와로 지은 집이다. 넓고 큰 돌들을 엮어 1단대의 지대를 마련한 위에 목조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집이다. 적멸보궁 기와의 입막새에는 법(法)자가 씌어져 있고 소화(昭和) 8년 11월 준공 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1934년에 법흥사의 기와를 굽고 새로 지었다는 뜻이다. 적멸보궁 내에는 사자사 법흥사 적멸보궁 훈수(薰修)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다. 여기에는 불기(佛紀) 이천구백육십육년 기묘 시월 일일이라 씌어 있으니 적멸보궁이 1939년에 중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적멸보궁 이전에 있었던 적멸보궁은 본래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에는 자장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토굴과 사리탑이 있다. 적멸보궁 뒤 축대 위에 있는 석조 사리탑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전해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흥사 적멸보궁 뒤 사리탑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뒷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 위를 덮었다.
봉토는 그다지 높지 않으나 남향한 입구의 정면만은 약간 높게 석축하였으므로 제일 높은 편이고 뒤쪽으로 가면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덮은 경사때문에 봉토가 크지 않아 약간의 봉긋한 표적이 있을 뿐이다. 석실의 외부구조는 원형으로 마치 분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분의 연도와 같이 개설된 입구는 몰을 굽혀서 겨우 출입할 정도인데 내부의 밑바닥이 입구보다 50cm 정도 깊어 몸을 일으킬 수 있으며 머리만 숙이면 굴 내에서도 다닐 수 있다. 굴 내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10단을 쌓아 올렸는데 마치 투팔천정처럼 차츰 돌을 모죽여서 줄어든 부분에 넓은 판석으로 천장을 얹었다. 석실 내부에는 특별한 시설이나 별다른 유물은 발견할 수 없다. 이 석실의 조성연대는 내부구조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내부의 높이 160cm, 깊이 150cm, 너비가 190cm 이다.
그 옆에는 석관의 잔해가 남아있다. 사리탑의 추측 축대 위에 쌓아둔 돌 무더기가 석관의 잔해이다. 본래의 위치가 아님이 분명하며 뚜껑 돌은 남아있으나 다른 부재들은 파괴되어 그 원형을 찾을 수가 없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이 선관은 바로 옆에 있는 석실 속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언제 이렇게 밖으로 나와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위치하고 있는 사리탑은 석조부도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의 형태는 八角圓堂形(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지대석은 넓직한 1단의 층단을 마련하고 그위에 하대석이 놓여있다. 하대석은 팔각의 하대와 연화대석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眼象(면상)이 음각되어 있고, 그 안에는 큼직한 花形(화형)이 양각되어있다. 연화대석에는 八瓣(팔변)의 複葉伏蓮(복엽복련)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면에 兩隅柱(양우주)가정연히 조출되어 있을 뿐 그 밖에 조각은 없다. 상대석의 측면 仰蓮部(앙련부)는 원형으로 되어있고, 위는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쪽 3단의 괴임을 각출하고 측면의 앙련은 상하로 각 16판씩 單葉(단엽)의 蓮瓣(연판)을 조각하였는데, 하단의 연판엔는 문양이 없으나 상단의 연판내에는 子房(자방)이 있는 四花紋(사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면에는 하면과 같이 3단의 받침을 각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상 · 하단이 약간 좁아진 배홀림이 있는 八角柱形(팔각주형)으로 전 ·후 양면에는 門扉(문비)를 모각하고 그 안에 자물통을 양각하였는데, 전 ·후면의 형태는 조금씩 다른점이 있다. 이 같은 전후 양면을 제외한 나머지 6면에는 모두 각종 입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전면 문비 좌우 양면에는 仁王像(인왕상)을, 그 밖에 좌우 양면에는 四天王像(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는 3단의 괴임이 마련되어 있고 낙수면 에는 8각마다 합각머리에 굵은 隅棟(우동)이 내려오고, 轉角(전각)에는 귀꽃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平薄(평박)하고 추녀의 반전과 귀꽃 등이 잘어우러져 경쾌한 감을 준다.
정상부에는 아무런 조식없이 覆鉢(복발)을 얹어 놓았다. 복발은 8각 편구형으로 중앙에 3줄의 융기된 橫帶(횡대)에 등근 자방이 있는 사엽화문을 양각하여 도합 8좌의 화문을 장식하였다. 그 위에 놓인 寶蓋(보개)는 옥개석과 동일한 수법의 양식으로 옥개석을 축소시켜 놓은 것과 같다. 보개 위로는 보주가 놓여 있다.
이 부도의 조성 시기는 앙 ·복련과 안상 등의 조성 양식이 고려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탑신부의 배흘림이나 각 면에 조각된 입상의 조성양식으로보아 그 보다 다소 뒤진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는 전체 높이 2.4m, 지대석의 한변의 넓이 1.5m이다
토굴의 외부는 뒷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을 엎었는데 남향한 입구 쪽 정면만 높고 뒷편은 경사 때문에 약간 봉긋한 모양의 원형으로 마치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1.48미터이며 외곽의 지름은 4-72-5.77미터이다.
토굴 안의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가 중심부에서 서쪽 한쪽만이 확장되고 가 모서리를 죽여서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주위의 벽과 천정은 자연석으로 축조했는데 평평한 면을 가려서 쌓아 마치 치석한 석재로 보인다. 벽은 10단을 쌓아 올리고 천정석을 놓았는데 6단까지는 거의 수직이고 7단부터는 모서리를 없애기 위해 장대한 미석을 건너 지르기 시작하여 8,9,10단에서 각을 죽여 거의 원형을 이루는 두팔천정(斗八天井) 형식이다.
내부의 높이는 키 작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인 160센티미터 너비는 190센티미터에 불과해 앞쪽에 조그마한 숨구멍만 남겨둔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자장 이후 다른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석관을 안치하여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고 경첩을 간직하던 곳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 옆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모셔올 때 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몸체의 개석이 모두 파손되어 있으나 각부의 부서진 조각이 잔존함으로서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석함은 한 개의 장방형 돌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 또한 징효대사가 쓰던 경함이라도는 설도 있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상원사 적멸보궁과 완연히 다르다. 앞은 비슷하나 뒤를 돌아가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들어가기는 힘들다. 스님들의 수도처인지라 소란스러워질까 출입을 금하고 있다. 뒤로 돌아가 입구룡을 살펴보니 정돌취기도 아니고 돌혈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자산 적멸보궁이 있는 터는 행룡간에 산정을 넓힌 형태로 물론 앞에도 혈처가 있지만 현재의 혈이라 주장하는 적멸보궁 뒤의 언덕 모양은 취기입수도 아니고 혈처도 아니었다.
용맥을 살펴본 결과 언덕처럼 동그란 곳은 입수처가 확실하다. 그러나 기맥의 흐름과 달리 당판은 측면으로 생긴 잉혈이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면 둥근 정상의 우측이 심하게 쪼그라들고 안으로 밀려들었음을 알 수있다. 즉 일종의 편산으로 이 경우 정상에는 혈이 생길수 없다.
듣기에는 적멸보궁을 의미하는 진신사리는 용맥 뒤쪽의 바위산 어디쯤에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돌아오다 보면 물을 마시는 곳이 있고 그 곳에서 올라가면 산신각이 나타난다. 산신각은 지은지 오래돼지 않았고 새로 지은 당우인지라 건물의 배치와 건물 형태도 그다지 신기할 것은 없으나 당우가 자리한 터는 눈여겨 볼 만하다.
삼성각 앞의 건물은 약사전이다. 지나치게 많은 인작으로 산의 모양이 변했을 정도이나 아래쪽으로 내려와 살펴보면 약사전이 자리한 터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역시 앞을 보고 있지만 음택지로 사용한자면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즉 밑에서 보면 전순이 어느쪽으로 뻗었는지 알 수 있고 전순의 모양으로 보아 잉혈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산을 내려와 법흥사 경내에 다다르면 그다지 볼 것은 없으나 두점의 문화재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징효대사 보인탑비다. 징효대사 절중(826~900년)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798~868년)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의 부도비는 법흥사 입구 왼쪽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 3.96m로 귀부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얹은 전형적인 부도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비신 일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에 "유당신라국사자산○○○○○교시징효대사보인지탑비명..."(有唐新羅國師子山○○○○○敎諡澄曉大師寶印之塔碑銘...)이라는 글씨를 36행으로 새겨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 내용을 적고 있다.
또한 비문 마지막에는 "천복구년세재갑진유월십칠일립"(天福九年歲在甲辰六月十七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천복9년, 곧 고려 혜종 1년(944)에 부도비를 세웠으며, 보인(寶印)이라는 탑호를 받아 징효국사보인지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대석과 귀부는 하나의 돌이며,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는 거북이 머리가 진취적으로 느껴진다. 콧대가 우뚝한 데다 두 눈도 부릅뜨고 있어 험상궂어 보인다. 귀부의 등에는 겹으로 된 육각의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귀갑문 안에 4엽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귀부의 네발은 방형의 지대석을 딛고 있는데 다섯 발가락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귀부의 등 위에 비신 받침대를 마련하고 각 면마다 구름무늬를 조각하였으며, 비신 받침대 위쪽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다. 그 위에 비신이 놓여 있으며 비신 위에 이수가 있다. 이수는 모서리에 각각 한 마리씩, 용 네 마리가 모두 목을 길게 뽑고 머리를 가운데로 내밀며 화염에 싸여있는 보주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형상이다. 정면 중앙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는 글씨가 전각체로 조각돼 있다. 보물 제612호다.
징효대사보인탑비의 서북쪽 약 30m 지점인 언덕 밑에 위치하고 있는 징효대사 부도는 강원도 지정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는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二板石(이판석)으로 구성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건립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는 8각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는 연화대석이 놓였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연화대석에는 八瓣(팔판)의 伏蓮(복련)이 돌려져 있고, 각 우각마다 複葉(복엽)이 한판씩 배치되어 있으며 그 끝에는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복련대 위에는 갑석형의 높직한 8각 괴임대가 마련되어 중대석을 받게 되었다. 중대석은 一石(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8각의 탑신형 으로 각 면에는 隅柱(우주)가 있다. 상대석의 상면은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8각의 괴임이 있고 그 위로 측면에는 단엽앙연이 이중으로 조각되어 있다. 원형의 상면 중앙에는 8각의 높직한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배가 부른 8각의 鼓腹形(고복형)으로 전후 양면에는 문비가 모각되어 있으나, 그 밖의 각 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8각의 옥개석은 一石으로 조성되었는데, 그 하면의 중심부에는 높직한 8각의 呼兄(호형)의 괴임이 조각되어 탑신 상단부와 맞도록 되어 있다. 낙수면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 오면서 점차 완만해 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평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추녀 끝 전각의 상단에는 귀꽃이 조각되어 한충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옥개 頂面(정면)에는 복엽의 복연을 조각하고 그 위에 1단의 형 받침을 각출하여 8각의 竿石(간석)을놓고 그 위에 보개를 받게 하였다.
보개석은 옥개석과 거의 같은 양식으로 전각에는 귀꽃이 있다. 보개 정면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一石으로 조성된 연뇌형의 보주를 얹어 상륜을 삼고 있다. 이 부도는 하대석의 구성과 안상 및 복연, 귀꽃 등 각 부분의 조식 수법이 羅末麗初(라말려초)에 많이 유행된 석조부도와 흡사하다. 그 밖에도 이 부도는 중첩된 앙연, 탑신부의 문비모각양식, 옥개석의 추녀와 귀꽃의 장식수법도 고려초엽까지 통용된 수법이다. 높이267cm, 지대석의 한변의 넓이 135cn 규모의 부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