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보고 갑사
갑사라는 이름은 으뜸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도 큰아들이나 장손에게는 갑(甲)자를 붙이기도 한다.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다.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 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정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써, 백제 구이신왕원년(久爾辛王元年,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후의 통일신라시기의 일이었다.
계룡산은 조용한 산줄기 곳곳에 암봉, 기암절벽, 울창한 수림과 층암절벽 등 경관이 수려고 아름답다. 갑사계곡은 계룡산 국립공원의 개 계곡중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을 만들어내었다. 봄에는 마곡계곡, 가을에는 갑사계곡이 아름답다는 의미인데 이처럼 단풍이 빼어나다. 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부속 암자로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을 거느리고 있는 계룡산 지역의 거찰이다.
갑사는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왜군의 대항하는 승별궐기의 거점이 되어 당시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시던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800여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선생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셨고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의 임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갑사는 조선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鍾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에는 대형의 이동은 임난후(壬亂後)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主要文化財)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象), 배살입상(菩薩立象),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등 5개의 부촉암(附屬庵)을 거느리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 5리길을 들어가면 가장 먼저 사천왕문이 나선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갑사가 나오고 좌측길로는 부도밭이 나타난다. 부도밭을 지나면 사적기가 있다. 비석에 쓰여진 사적기 좌측에는 치마 모양의 바위가 나타나는데 치마바위는 풍수이론에 난의사(亂衣沙)라 하여 음란한 기운으로 본다. 이 바위 앞에 사적기가 있는데 앞이 암반이라 좋은 자리이다.
현종(顯宗) 원년(1659)에 세워진 이 사적비는 자연 암반의 중앙에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대리석(大理石)의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비신위에 옥개형태(屋蓋形式)의 비개(碑蓋)를 놓고 정부(頂部)에 별석(別石)의 보물(寶物)을 올렸다. 비문(碑文)은 비신의 상단(上端) 전후면(前後面)에 전서체(篆書體 )로「公州 鷄龍山 甲寺事碑銘」이라 횡서하였다. 비문의 일부는 손상되어 판독이 불가능한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碑石材)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실측치는 다음과 같다. 비신고(碑身高) 225cm, 폭(幅) 133cm, 두께(厚) 49cm, 비경고(碑莖高) 112cm, 비문자경(碑文字徑) 3cm이다.
계속 올라가면 표충원(表忠院)이 나타난다. 방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된 표충원은 선조(宣祖)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승려의 몸으로 승병을 모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14년(1738) 이 분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
이표충원 안에 영규대사비가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僧兵>을 일으켜 승병 궐기의 계기를 만든 영규대사?∼1592)의 정려비<旌閭碑>다. 대사는 유평리에서 태어나 계룡산 갑사 청련암<淸連庵>에서 수도 하였고,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였다. 왜인의 침략과 약탈에 분을 참지 못하여 3일을 통곡하고 승려 수백 명을 모아 승병장이 되었다.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고, 이어 금산 연곤평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이곳 월암리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다. 정려 좌측에 있는 비문에 숭정 기원후 계유년<崇禎紀元後癸酉年>으로 되어 있어 숙종 19년(1693)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비를 세운 이덕윤<李德潤>·유중<劉重>·각총스님<覺聰>·박경태<朴景泰> 등의 생존 연대를 보면 1813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표충원을 지나 계곡을 올라가면 팔상전이 나타난다. 문화재자료 제54호 갑사팔상전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신중탱화<神衆>를 모신 곳이다. 팔성전<八相殿>은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모시는 곳이며 이곳엔 신중탱화 한 폭도 봉안하고 있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을 묘사한 그림으로 호법신은 대개 우리 나라 재래의 신들이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외관을 다포식<多包式>으로 꾸며 격식을 갖추었다.
팔상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다보면 작은 개울 건너 내원이 있다. 사찰의 출입제한구역으로 안쪽에 월인석보 판목을 보관하는 당우가 보인다. 이곳에 보관중인 월인석보 판목은 보물 제582호이며 갑사 월인석보 판목은 불교 경전인 월인석보를 나무에 새긴 것으로, 권당 57매 233장으로 모두 25권이었으나 현재 21권 46매가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원판이다. 이 판목은 선조 2년(1569년) 충청도 한산 사람 백개만이 시주해 나무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논산 쌍계사에서 유판된 것을 갑사가 소장하고 있다. 월인석보는 조선 세조 4년에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묶어 편찬한 불교대장경으로, 갑사 판목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15세기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있어 국어학적으로도 중요 자료이다.
조금 더 내려오면 범종각이 있고 그 뒤에 지방문화재 제95호인 갑사 강당(講堂)이 있다. 갑사의 해탈문(解脫門)과 대웅전(大雄殿)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강당(講堂)은 원래 승려들이 법문(法文)을 강론(講論)하던 건물로 맞배지붕에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이다. 기단(基壇)은 자연할석으로 낮게 쌓고 입구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주초(柱礎)도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중앙의 어칸(御間)에는 3구, 양쪽 협칸(夾間)에는 2구씩의 공포를 배치하고,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이며 포작(包作)의 구성은 앞뒤면이 같다. 기둥은 배흘림을 주어 안정감이 있다. 단청은 완전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며, 창틀은 개수되어 원형이 아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架構)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朝鮮時代) 건축이다.
옆에는 중각이 있다. 이 누각 안에 보물 제478호 동종(銅鐘)이 보관되어 있다. 이 종은 해탈문(解脫門)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안에 있다. 이 동종의 종신부(鐘身部)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龍)이 네 다리와 몸체로 유(종을 매다는 꼭지)를 이루어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며, 용통(甬筒)은 없다. 각부의 표현이 웅건(雄健)한 수법으로 조성된 우수작이다. 종의 어깨부분에는 물결 모양의 꽃무늬를 원형으로 두르고 바로 밑에는 위·아래로 구획하여 위에는 연꽃무늬, 아래는 범자(梵字)를 촘촘히 배치하였다. 이 횡대(橫隊)에 거의 붙어 있는 방형(方形)의 유곽(乳廓)안에 9개의 유는 연꽃무늬 가운데 원형으로 튀어 나왔다.
이 네모난 유곽띠 안은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되고 유곽은 대칭되게 4개가 있다. 당좌(撞座)는 구름무늬로 받쳐진 원형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을 잡은 늘씬한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다. 밑부분 종구(鐘口)에서 14cm위에 연꽃무늬와 보상화(寶相華) 무늬를 교대로 한 당초문(唐草紋)띠가 있다. 몸체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朝鮮) 선조(宣祖)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이름도 당시는 갑사사(甲士寺) 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9cm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은 지방문화재 제105호이며 갑사의 본전(本殿)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에 중건(重建)하였다.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부근으로 보이며, 중건시 이건(移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간격은 가운데 3칸을 협칸(夾間)보다 넓게 잡아 공포를 2구씩 배치하고, 협칸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쇠서는 완만하게 휘어 있고 대체로 조선시대(朝鮮時代) 중기(中期) 양식(樣式)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초각(草刻)도 눈에 띈다. 내부는 우물천장에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석가여래불상(釋迦如來佛像)을 안치(安置)하고 있다.
갑사 소조삼세불이라 불리는 석가여래불상은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65호다.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높이 255㎝로 둥근 얼굴에 백호가 조각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소조좌불이다. 우측에는 아미타불(높이 235㎝), 좌측에는 약사여래(높이 235㎝), 그리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등 4대 협시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좌측면에 출입이 금지되는 공간이 있고 담이 높다. 담안에 중사자암지 3층석탑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본래는 부속 암자인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대적전 뒤편에 위치했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탑의 높이는 190㎝이며 하층 기단은 결실된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먼저 지면에 잇대어져 4장의 장대석(長臺石)을 가구하여 지대석을 놓고 있는데 4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 지대석 위에 곧바로 갑석(甲石)이 올려져 있으며 갑석에는 우동(隅棟)이 성형되어 있고 옥신(屋身)의 받침이 몰딩으로 처리되었다. 옥신은 우주(隅柱)의 표현이 약하게 이루어져 있고 옥개(屋蓋)에는 3단의 층급받침이 조성되어 있으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이루어져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본래의 것이 제거되었으나 석질이 다른 새로운 것으로 연봉(蓮峯) 형태가 올려져 있다.
대웅전 뒤에는 삼성각이 있다. 문화재자료 53호 갑사삼성각(甲寺三聖閣)은 그다지 특이점은 없지만 칠성신앙이 깃들어 있다.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아도화상이 처음 지었고, 통일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의상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치고 넓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칠성, 산신, 독성의 삼성을 모신 곳이다. 건물 이름이 삼성각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수명장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의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지어 삼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삼성각 안에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성각 뒤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대적선원으로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대적선원 안에는 2기의 부도가 있다. 이 2기의 부도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찾아봄도 좋다.
부도를 보고 사자암으로 넘어가는 것도 좋지만 문화재를 탐방하고 풍수를 배우려면 계곡쪽으로 길을 틀어 우공탑으로 간다. 우공탑을 지나면 대적전이다. 대부분의 자료를 보면 갑사의 입지에 대해 관습적으로 연천봉 기슭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갑사는 연천봉 기슭과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다. 오늘의 갑사는 정상인 천황봉(845.1m)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쌀개봉을 지나 관음봉(816m)을 기점으로 하여 서쪽으로 연천봉, 북서쪽으로 자연성릉을 지나 삼불봉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왜 연천봉 기슭이라고 하는지는 대적전에 가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유형문화재 제106호 갑사 대적전은 경내에서 좌측에 흐르는 계곡을 건너 원금당지로 추정되는 지역에 위치한다. 건물은 정면 3칸(8.63m), 측면 3칸(7.41m) 규모로 평면은 장방형의 형태이다. 기단 정면은 높이 60㎝ 가량의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주좌가 표현된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그랭이질한 원형기둥을 올렸다. 대적전은 현재의 중심 영역인 대웅전과는 별개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연천봉이 흘러내려 다리를 편 곳이다. 대적전이야말로 풍수적으로 갑사를 지탱하는 곳이다. 가장 정상적이고 강한 기운이 머무는 곳이다.
대적전 앞에는 보물 제257호인 고려시대 부도(浮屠)가 있다. 본래 뒤쪽 산중에 있었으나 1917년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刑)의 부도로 팔각(八角)의 지대석(地臺石)위에 팔각(八角)의 기단(基壇)을 만들고, 사자(獅子)와 권운(圈雲)과 용문(龍紋)을 조각(彫刻)하였으며, 중대석(中臺石)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과 탑신(塔身) 양면에는 호형(弧形)을 조각하고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식(彫飾)하였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세부양식을 번안하여 우아하게 조성하였다. 각부양식(各部樣式)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건조(建造)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100m쯤 가면 보물 제256호인 철당간과 지주가 나온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15m, 지주의 높이는 3m이다. 당간 지주는 절 입구에 세우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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