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을 바라보는 연미정
인천시지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번지에 있다. 월곶은 강화도의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며 이 마을은 군사통제지역이기 때문에 출입이 어렵다.
민통선 북쪽에 있기 때문에 미리(1-2개월 전) 해병 제2사단에서 출입허가를 받아야 한다. 안내를 하는 병사를 따라 관람이 가능하며, 원칙적으로 북쪽을 향해서는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학술, 교육 목적의 경우에 한해서 출입이 허가 되며 관광 목적으로는 허가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연미정이 자리한 월곶돈대는 과거의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있다. 월곶돈대는 작은 산위에 지어진 돈대다. 계단을 타고 올라 월곶돈대에 오르면 과거의 성벽은 어느 정도 남아있으나 마을 방향으로 새로이 길이 나고 논밭으로 인해 과거의 모습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높은 주춧돌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사람 키에 해당하는 높이의 바위를 기둥처럼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두자 정도의 높이를 지닌 기둥을 세웠다.
연미정은 월곶리에 있는 정자로 연미정의 달맞이는 신강화팔경의 하나다. 이 정자의 창건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 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 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느티나무다.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남쪽과 북쪽에 있다. 마치 연미정을 호위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 나무는 보호수다. 연미정은 월곶돈대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 시원하며, 북한과 한강이 한눈에 보인다.
연미정이 자리한 월곶돈대는 모습이 변한 것이 틀림없다. 앞쪽은 돌로 제방처럼 쌓아 바닷물에 흙이 쓸려나가는 것을 방지하였고 뒤로는 논과 마을이 있어 입수룡 방향의 모습이 변해버렸다. 마을뒷산에서 월곶돈대에 이르는 중간에 논이 있는데 오래된 것으로 보아서는 초지진과 같이 은맥(隱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연미정이 자리한 곳은 유혈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양의 현대에 이르러 사람의 손을 탄 듯하다. 눈여겨 볼 것은 연미정 왼쪽의 용맥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연미정이 있는 곳에서 한줄기의 기맥이 왼쪽으로 뻗어나갔는데 당판이 이루어져 잉혈이 맺혀져 있다.
귀를 기울이면 바닷물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이 바닷물인가 혹은 민물인가 하는 것은 풍수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연미정을 혈처로 보아 묘를 사용한다면 이 물이 발치에 있으므로 물의 가치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풍수사들은 바다를 물로 판단하지 않는다. 즉 물은 풍수에서 재복(재복)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재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물이 흐르며 들리는 소리는 인정하는 편인데 물소리는 후손의 주변에서 시끄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판단하는 것이 정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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