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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동 영국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6-02-08 조회수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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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보물이 많은 영국사

영국사(寧國寺)는 양산팔경 중 제1경으로 영동에서 16km쯤에 위치한 천태산(일명 지륵산)에 있으며, 신라 문무왕 8년 원각대사가 만월사란 이름으로 창건하고 그 후, 효소왕이 육궁백관을 인솔하고 피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지륵산(천태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영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서 보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천태산은 등반인들에게도 매우 이름이 높은 산이며 작은 폭포와 물줄기. 그리고 작지만 깊은 계곡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영국사도 여러번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문종 때에는 대각국사가 절 이름을 국청사라고 한 것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와, 나라의 태평함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사찰은 오랜시간동안 만들너지고 소멸되며, 또 중건이 이루어진다. 고려 고종 20년 감역 안종필이 명을 받아서 부도 및 금당을 창건하였고,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조 후기의 건축물이다. 경내엔 대웅전을 비롯, 산신각ㆍ요사채ㆍ영국사 부도ㆍ삼층석탑ㆍ원각국사비ㆍ망탑봉 삼층석탑ㆍ은행나무 등이 있다.

영국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은행나무다. 언뜻 보아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더 커보이기도 하다.

영국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수종은 은행나무 암컷이고 수령은 600년쯤으로 보지만 대부분 1000년정도로 판단하고 있다. 수고는 약 35m이고 둘레는 11m이다. 영국사에서 200m 떨어진 입구 왼편에 있다. 가지는 2m 높이에서부터 갈라져, 동서 방향으로 25m, 남북 방향으로 22m 정도 퍼져 있다. 동남쪽 가지 중의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여기서 자란 새순의 높이가 5m 이상이고 지름은 20cm 정도이다.

영국사는 그다지 큰 사찰은 아니다. 기존의 모습을 살피고 대조해보면 대웅전은 신좌을향으로 되어 있다.대웅전 안은 정면에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이 석가여래좌상이고, 좌우 양쪽이 관음보살좌상이다. 뒷벽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서쪽 벽에는 신장탱화, 동쪽 벽에는 삼장탱화, 뒤쪽에는 칠성·독성·상단정신조성탱화가 걸려 있었지만 해체 보수가 끝나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쪽 앞편에 동종이 놓여 있다. 이 건물은 1980년 해체,복원되었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영국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533호로 신라식 일반형의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는 3층의 탑신을 세웠으며, 기단부는 상하층 수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으며, 면석에는 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탑은 원래 옛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42년에 주봉조사가 지금의 대웅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장대석 4,5개씩을 일변으로 삼고 석단을 구축한 위에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사찰방향을 따라 동향을 취하고 있다. 석탑은 신라식 일반형으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봉안하였다.

영국사를 벗어나 작은 골짜기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바위가 있고 그 옆으로 물이 흐른다. 이 바위에 작은 부처상이 모셔져 있다. 이 자리의 기운이 왕(旺)하니 살펴볼 것을 권한다.

계월암 앞을 지나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자 거대한 비석이 나타난다. 원각국사비다. 보물 제534호로 영국사에 안치된 원각국사비는 명종 10년(1180년)에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 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는데, 비석의 위치는 영국사 남쪽으로 150m되는 낮은 언덕 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세워져 있다. 원각국사는 본명이 덕소, 자는 혜약, 어려서 이름은 자미, 성은 전씨, 시호는 원각국사로 대선사 교웅의 문하에 들어가서 9살에 중이 되었고, 고려 의종 7년(1154년)에 선사가 되었으며, 명종 1년(1171년)에는 왕사가 되었고, 1174년 입적해 이곳에 안치되었다. 원각국사비는 기맥을 타고 모셔져 있지만 그것뿐이다. 풍수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원각국사비 뒤에는 두개의 부도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영국사 원구형부도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85호이다. 이 부도는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확실한 주인공은 알 수가 없다. 그 뒤에 다시 석종형부도가 있는데 지방유형문화재 184호이다.

두개의 부도를 보고 다시 계곡 안쪽으로 약 50여미터를 올라가면 물이 흐르지 않는 작은 계곡을 건너 산능선에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영국사 하면 떠오르는 영국사 부도이다. 영국사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화재가 바로 영국사 부도다.
보물 제532호인 영국사 부도는 영국사 남방 약 200m되는 언덕 위에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팔각당형 부도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이 부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원각국사 유골이 영국사에 안치되어 있다는 비문을 유추하면 이 부도가 원각국사 사리를 안치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부도는 전형적인 명당을 택해 세웠다. 풍수적 관점으로 보아 영국사 부도의 위치는 천태산 줄기의 끝에 맺힌 산진처에 해당하는 곳이다. 유혈의 혈상을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 사찰의 대부분 부도가 절 앞의 터에 모아져 모셔진 듯 보이지만 사실 고승의 부도는 따로이 모셔진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음택(陰宅)의 이치를 따져 모셔진 경우가 많다.

영국사 부도는 이 법칙, 즉 양택이 아니라 음택의 법칙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어느절이나 음택의 법칙과 양택의 법칙을 따르는데 음택의 법칙은 부도이고 양택의 법칙은 바로 도량이다. 이처럼 음택의 법칙을 따라 부도탑을 세운 경우가 바로 여주 신륵사와 회암사지 속리산 법주사내의 암자들에 있은 부도와 같은 경우다.

망탑봉 삼층석탑은 보물 제535호로 영국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의 망탑봉 정상에 있는 것으로, 거대한 화강암반의 위에 건립한 일반형의 석탑이며,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하였다.

또한 이 탑에서 서북쪽으로 20m쯤 되는 지점에 흔들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6m, 높이 8m, 무게는 10여톤 이다. 마치 고래가 바다 위를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혼자 흔들어도 움직여서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영국사에는 전설이 있다. 어느 사찰이고 전설이 없으랴마는 영국사에는 정말로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전설이 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홍건적들이 황해도를 건너서 개경까지 육박하자, 왕은 이 절로 피난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원 마니산성에 근위병을 포진하여 놓았다. 이 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 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해놓고 옥새를 맡겨 두었다.

그뒤 마니산성의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함정에 빠뜨려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자, 공민왕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평국민안이 되었으니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라 하고 현판을 써준 뒤 떠났다 한다.

또,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가 산 이름을 지륵으로 절 이름을 영국사로 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절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높이 3.5m의 석성지가 남아 있다. 아마도 역사의 일부는 영국사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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