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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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야천변의 풍수림과 금계리의 학봉종택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4-04 조회수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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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안동 시내에서 서쪽으로, 풍산(豊山) 예천(醴泉)을 거처 서울을 향해 가는 길로 5킬로미터쯤 가게 되면 송야교(松夜橋)라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옛날 공민왕(恭愍王)이 안동으로 몽진(蒙塵)할 때, 안동 향민(鄕民) 부녀들이 노국공주(魯國公主)와 왕비를 뫼시는데 사람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했다는〈놋다리 밟기〉의 전설을 남긴 냇물, 송야천(松野川)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이 송야천을 건너서 제방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2킬로미터 정도 가게 되면 안동시(安東市)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다. 이곳에 학봉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다리가 송야천(松夜川)에 걸려 있는 솔밤다리이다. 다리 끝에서 우회전하면 봉정사와 서후면 저전(苧田)으로 가는 924번 지방도로 이어진다. 방죽길 오른쪽에는 송야천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제법 넓은 논이 있고, 그 뒤로 나지막한 산을 등진 집들이 올망졸망하게 흩어져 있다.
그런데 우회전하여 왕복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불과 200여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강둑으로 아름들이 나무들을 만난다. 길 오른편의 강가에 심어진 나무들은 제법 오래도록 자란 나무들이다. 하루이틀 자란 나무들이 아니라 수십년 이상 자란 나무인데 약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심어져 있다. 송야천변에 심어진 이 나무들은 과거에는 더욱 길게 심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이 흐르며 베어지거나 사방공사로 없어지게 되었지만 선인들이 풍수림으로 조성한 나무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 나무들이 심어진 곳을 살피면 전형적으로 앞이 열린 형상이다. 즉 금계리 방향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이 낙동강을 향해 은은하게 돌아가는 곳으로 명리나 교리 방향에서 보면 수구가 트인 곳이다. 즉 이 나무는 의도하지 않고 심은 것이라 해도 수구막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어떤 형상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는 교리와 명리에서 강을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강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나무를 조성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강가에 심은 나무들이 풍수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수림은 한국 고유의 풍수기법이다. 땅은 모든 생명체의 모태(母胎)이며 또 마지막으로 귀의하는 고향이다. 풍수지리설은 그 땅의 기(氣)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그친다. 그러므로 풍수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물을 관리하는 득수(得水)와 바람은 잡는 장풍(臧風)이다. 풍수라는 어원도 바로 그 장풍과 득수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에서 보아 물이 나가는 쪽을 수구(水口)라고 한다. 풍수적으로는 파(破)라고 한다. 파를 그대로 두면 그 물길을 따라 복이 나가고 삿된 것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즉, 생명의 원천이며 농사에 요긴한 물이 그대로 흘러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옛 사람들은 수구에 숲을 조성하거나 장승 등을 세웠다.
이 길을 따라 2킬로미터 이상 들어기면 좌우로 고색창연한 많은 건물들이 보인다. 길 좌우로 약 6km 남짓 펼쳐지는 마을이 유명한 검제마을이다. 길가에도 건제라는 마을 이름을 알리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고 좌우로 기와집이 있으며 또 곳곳에 유명인의 묘를 알리는 비석도 있다.
검제는 안동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름의 유래나 의미를 아는 이가 없다. 19세기 이 마을 출신인 용암(榕庵) 김헌락(金獻洛, 1826∼1877)은 검제의 산천, 인물, 풍속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편찬한 [금계지金溪志]는 마을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금계(金溪)는 금지(金池)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금제(琴堤)로도 불렀는데, 금(琴)이 사투리로는 검(黔)과 같기 때문에 검제(黔堤)라고도 한다. 어떤 이들은 “옛날에 시내가 두 개의 물로 나뉜 사이에 넓게 열려 있는 모습이 마치 거문고 같았기 때문에 금제(琴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의성 김씨가 번성하여 금계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가 없다.
검제 출신들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남다르다고 한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검제가 명당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명당의 조건은 무엇인가? 특히 양택명당으로서 명당의 조건은 무었이던가?
어떤 양택이나 마을이 명당으로 이름이 낫다는 것은 결국 훌륭한 인물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인물이 없어도 명당으로 지칭되는 경유가 잇는데 이는 지리적인 요건이다. 지리적인 요건이라는 것은 생기적인 풍슈요건에 비추어 보국이 잘 짜여진 곳이다. 이는 음택풍수와도 연관이 있다.
명당에서는 인물이 난다. 음택이나 양택이나 그 이치는 다르지 않다. 예로부터 조상의 묘를 잘 쓰는 것으로 효도와 그 음덕을 논하였고 양택은 현재의 삶을 논하였다. 공통적인 것은 사람의 인물됨이나 심성을 통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는 것, 혹은 많은 자손을 두는 곳이 조상을 모신 음택의 영향이거나 현재 살고 있는 가옥의 입지와 위치, 형상에 따른 명당터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곳에서 부근의 산과 물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그것이 일종의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를 일러 명당에서 인물이 나는 것으로 해석되었는데, 명당에서 인물이 난다는 것이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풍수의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이다.
인걸지령이란 글자 그대로 땅과 사람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사람은 태어난 지역의 산과 물에 영향을 받는 다는 이 속성은 흔한 말로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강원도 비탈, 경상도 보리문둥이, 경기도 깍쟁이 등등이다. 이는 지역적인 특징을 뭉뚱그려 놓은 것으로 이는 지역의 특색인데 지역의 물과 산이 그러한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사회는 오랜세월부터 땅의 기운을 논하였고 지금도 풍수지리는 민속의 신앙처럼 여겨진다. 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단순한 술법이 아니라 5000년 이상의 민족 역사가 이어져오며 자연적으로 습득되어진 자연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가 많이 사리ㅏ지고 있으며 서양의 과학이 만능인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임에도 명망 있는 인물이 배출되었을 때 그 배출의 당위성을 땅의 영험스러움에서 찾는 우리들 만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평소 풍수지리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막상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땅을 찾고 가상을 논하며 조상의 묘를 파고 화장을 한다. 이는 내제된 마음속에 풍수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은 명당으로 여겨지는데 검제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아직도 유명한 종가가 있다. 아마도 학봉종택이 그 대표주자격인 건물일 것이다.
길가에서 바라보니 학봉종가의 모습이 완연하다. 길을 따라 100미터를 들어가 담 앞에 차를 세웠다. 솟을 대문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에 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학봉종택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져 있다.
서애와 함께 퇴계의 총애를 받은 제자 중 하나가 학봉 김성일이다. 서후면 금계마을 학봉종택은 잘 단장돼 있지만 옛 멋이 뚝뚝 묻어나올 만큼 고풍스럽지는 않다. 종택은 1964년 옮겨 지은 것이다. 학봉 종가에서는 볼거리보다 들을 거리가 많다. 학교에선 이렇게 배웠다.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김성일이 전쟁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정에 보고해서 큰 화를 당했다고. 하지만 학봉은 정사와 부사가 함께 전쟁의 위험성만 강조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해 민심을 안심시키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단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학봉은 당시 당쟁에서 우세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고 조선은 안인하게 대처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된통 당했다. 당시 당쟁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닌 서애 유성룡의 제자였기에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 역사는 이긴자의 기술이다. 결국 역사는 학봉에게 유리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학봉의 무리수일 것이다.
학봉 집안은 대쪽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비 집안이다. 학봉 자신이 임진왜란 때 의병과 관군을 돕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일제 때에는 집안에서만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후손이 무려 13명이나 된다. 11대 손 김흥락은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13대 손 김용환은 당대에는 대원군과 함께 대표적인 파락호로 유명했다. 술집과 노름판을 드나드는 파락호로 가장, 일본인의 감시를 피했다. 그는 전답은 물론 문중재산까지 팔아 독립군 군자금으로 댔다. 정작 자신의 딸이 시집갈 때는 헌 장롱 하나만 들려보냈다고 한다.
학봉종택은 1964년 옮겨지은 것이라 했다. 따라서 건물의 요모조모는 피하고 살펴ㅛ보기로 했다. 우선 외부에서 보니 작지만 단단하고 유정하게 보이는 금형산이 정확하게 뒤에 받치고 있어 터가 안정되어 있으며 재화(財貨)가 있음을 알겠다. 이전하여 지은 사람이 풍수를 알고 제대로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솟을대문의 경우는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측면을 보는데 이는 서후면 봉정사 방향의 계곡을 바라보는 격으로 장면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 이는 전형적으로 풍수적으로 문을 어디에 낼 것인지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가옥의 배치는 너른 뜰을 지나 사랑채가 있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ㅁ자 집이다. 이러한 집의 특징은 주(主)가 약해지거나 여러개가 되어 가옥 내의 식구들 사이에 다툼이 있거나 주장이 상반되는 경우가 있는데 다행이 안채의 지붕이 높고 중보와 대들보가 모두 들어나 상량이 보이니 주(主)가 확실하여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나와 살핀다.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없으나 뜰에 놓은 돌들은 매우 문제가 된다. 뜰에 모여진 돌의 크기는 작게는 쌀가마정도이며 큰 것은 쌀가마 두개정도인데 뜰은 여자의 공간이고 돌은 기온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뜨락에 커다란 돌을 놓은 것은 여자의 몸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매우 불길한 일이니 돌은 치우는 것이 좋다. 돌중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돌이 있었다. 남근석이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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