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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대최고의 투전전문가 원인손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4-20 조회수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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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에는 효종의 사위였던 원몽린의 묘역이 있다. 이곳 묘역에는 적지 않은 원주원씨들의 묘가 있다. 원주원씨는 대단한 세족으로 이곳 상구리와 북내면 장암리에 세장지가 있는데 한결같이 명당이다.

상구리에 있는 원몽린의 묘는 2004년에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신면 소재지나 여주군에서 클럽 700골프클럽을 지나 고달사지로 가는 길목에 원몽린 묘역이 있는데 작은 소쿠리 모양의 골짜기에 약 10여기 이상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중 가장 앞쪽, 입구 방향에 자리한 원주원씨 원인손, 즉 원몽린의 손자이며 효종의 딸이며 원몽린과 혼인한 경숙공주의 증손자인 원인손의 묘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원인손이 대단한 투전꾼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활주변에 존재한다. 지나치지만 않으면 좋은 두뇌게임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포커, 중국의 마작, 한국의 투전판 등 도박의 가지 수는 수도 없이 많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자신이 밤에 역관, 비장(裨將) 등과 투전판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급 사이에도 도박이 유행했다.

유가(儒家)의 이념으로 무장된 이들에게 도박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하나의 돌파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논하기를 ‘재상 명사들과 승지 및 옥당 관원들도 이것으로 소일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소나 돼지 치는 자들의 놀이가 조정에까지 밀려왔으니 역시 한심한 일이다’라고 한탄하였다”고 인용 소개했다.

강명관 교수(부산대)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 역사간>이라는 저서에서 18세기에 원인손(元仁孫)이 투전계 최고의 고수였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 당시 투전은 단지 양반들의 도구만은 아니고 관리들의 특권은 아니었다. 아울러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으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원인손은 효종의 딸인 경숙옹주(敬淑翁主)의 손자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元景夏)의 아들이다. 원인손 역시 이조판서, 우의정에 오른 명문가의 후예다. 원인손은 투전목 80장을 한번 보면 섞어 뒤집어 놓아도 뒷면의 그림을 다 알아맞혔다고 한다. 대단한 두뇌임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아버지 원경하가 투전을 못하도록 후당에 가두자 투전꾼을 불러 모아 병풍으로 사면을 가리고 촛불을 켜놓고 골몰했다는 것이다.

원인손의 묘는 기맥을 타고 물이 나가는 파구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의 좌향에서 좌선익 방향이 유난히 부른 듯한 지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좌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보다 발달한 모양인데 전형적인 잉혈의 모양이다. 눈여겨 본다면 찾을 수 있다.

원주원씨는 명문이다. 영의정을 지내신 당대의 영웅도 투전을 좋아한 모양이다. 그러나 묘역은 재산을 잃게 생긴 모습이다. 예로부터 혈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파구가 열리면 재산이 나간다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다. 물론 혈이 이루어졌다면 나가는 재산 이상의 이득이 있으니 묘역을 조성하는데 주저할 일은 아니다. 당대의 최고 투전판의 승부사라 해도 사후에는 돈이 나가는 파구를 어쩌지는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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