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
진천 농다리로 알려진 진천농교는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 불리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의 돌다리(石橋)이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증평 IC에서 진천 IC 방향으로 가다보면 중간 지점에 서울방향 오른쪽으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이는데 농다리이다.
처음에는 찾아가는데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진천 읍내의 용화사를 둘러보고 출발했는데 정상적이면 구곡리 방향으로 난 길을 가야 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신정교를 건너 증평으로 이어지는 34번 도로를 만났다.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오갑교를 만났다. 오갑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둑방길이 있고 이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자 고속도로 밑을 통과했다. 그리고 우회전하여 난 길을 따라 계속가니 왼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산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진천읍에서 들어오는 큰 길을 만나 롱다리 간판을 보고 진입할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찾아간다면 진천읍에서 구곡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 진천농공단지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아룡과 문상초등학교 앞을 지나 구곡리로 간다. 구곡리에서 농교 안내판을 보고 고속도로 밑을 지나 농다리로 이어진다.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어 차를 세우기 편하다.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교라 부르거나 농다리라고도 한다.『상산지(常山誌)』(1932)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만들었다.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상판석을 얹어 놓고 있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으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TV 드라마 등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고 있어 널리 알려졌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풍파에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눈길을 끄는 이 다리는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고종때의 권신인 임연 장군이 전성기 때 고향인 이 곳에 만들었다고 한다. 유적이나 사적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연은 매일 세금천에서 세수를 했는데, 어느 날 세수를 하다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리를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어느정도는 신격화 하기 위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이라면 임씨 가문의 재략과 이 지역에서의 세도나 구매력, 혹은 지역의 패자임을 보여주는 설화로 더욱 강화되고 부가되엇을 것이다. 물론 당대의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임연 축조설에 대한 이설(異說)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진천 출신인 신라 김유신 장군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최근까지 논란을 빚었다고 한다. 김유신이 신라에서 매우 뛰어난 장군이라는 것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신격화 된점도 사실이다. 진천의 문화 대부분이 어거지로 김유신에 꿰어 맞추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겨우 100년 이내의 세월을 산 사람이 진천의 수천년을 지배하는 느낌이다.
아무튼 다른 이설에 의하면 임연의 선조인 고려초 호족 임희에 의해 이 다리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어느 주장이든 그 근거가 미약하고, 농다리가 설치되기 이전에 대한 고려가 충분치 않은 듯하다.
어쩌면 이 다리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초부들에 의해 강을 건너기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일찌기 세금천 양편에 펼쳐진 농경지 경작을 위한 교통로인 다리가 존재했고, 현재의 농다리는 임희나 임연 등 상산 임씨 일족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확해 보인다.
특히 임연은 중앙으로 진출한 뒤 자신의 고향인 진천을 두차례나 승격시키고 이 일대 광대한 농장을 구축, 임연이 그의 세거지인 구곡리에서 세금천 건너편 농장을 경작키 위한 목적으로 기존 다리를 더욱 크고 견고히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권력의 소산이 되어버리기 이전에 이곳에는 널다리 형식이라도 다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다리는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는 돌이 있어 농다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석으로 엉성하게 쌓아 올린 듯한 교각과 그 위에 걸쳐 놓은 1m안팎의 상판돌의 모양 때문에 얽는다는 뜻의 농(籠)자가 붙여졌다고 한다.
교각은 자석(磁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렸으며, 석회로 보강하지 않아 교각으로도 물이 통하고 있다. 농다리는 이처럼 교각 높낮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교각의 간격 상판 크기 등이 일정치 않아 얼핏 보면 돌을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물난리에도 농다리가 원형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각의 형태는 유선형으로 해 강의 물살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 했으며, 유선형 교각은 앞뒤 좌우가 대칭을 이루기 때문에 교각이 받는 수압도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이루고 세굴현상도 적게 나타난다.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는 돌이 있고, 얽다는 뜻의 한자가 사용된 농다리 외에도 장마 때마다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간다 해서 붙여진 수월교(水越橋)라고도 불린적이 있다. 또 상공에서 보면 거대한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네다리와 겨울철 농다리의 설경이 빼어난 것에서 붙여진 농암모설, 진천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진천 농교, 농암다리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건너면 아낙네가 아들을 낳게 되고, 노인은 무병장수한다고 믿는 한편, 재앙을 예고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장마에 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사망하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치로 보아 농다리는 풍수와 전혀 연관이 없을 듯 보인다. 단순히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돌을 잘 쌓는 기술 때문만은 아닌 것이 이 다리를 죽조한 기술이나 이유 때문이 아니다.
왜 굳이 28이라는 숫자에 집착했을까? 동양에서는 28개의 황도대 별자리를 일러 숙(宿)이라 일렀다. 동양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숙(宿)은 동서남북 각각 7개의 별자리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형상을 만드는데 각자리는 청룡의 뿔에 해당한다.
28숙은 오래도록 우리 민족의 문화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경우 도성의 모든 문은 종루에서 저녁 10시경에 울리는 28번의 인산(因山) 소리에 맞추어 닫고 새벽 4시경에 울리는 33번의 파루(罷漏)소리에 맞추어 열었다. 인정에 28번 종을 울리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日月星辰) 28숙에 고하여 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파루에 33번 종을 울리는 것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에 고하여 오늘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지만 이 인정소리에 도성문을 닫아 모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고 파루소리에 도성문을 열어 통행금지를 해제하였다.
따라서 진천농교에 28이라는 숫자를 사용한 것은 그냥 지나치는 무심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별처럼 영원하리라는 기원이 있을 수도 있고 신앙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28이라는 숫자는 풍수와도 관계가 있다. 이러한 측면은 풍수도 점성술이나 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풍수라는 것이 동떨어진 것이나 단순히 중국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토속신앙이야말로 가장 풍수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는 크게 형기와 이기의 두가지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중 한국의 토속적이고 자생적인 풍수는 형기론에 가깝다. 형기란 청룡, 백호를 비롯한 주변 산세의 형태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의 형태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지닌 속성은 물론이고 기맥의 흐름을 매우 중요시한다. 산을 따라 흐르는 기의 흐름을 감지하고 산이 지닌 성정을 유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비해 이기는 어느 시점에 발복할 것인가, 즉 운이 언제 오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지극히 발복을 따지는 이론이지만 역시 기맥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선천팔괘(先天八卦), 후천팔괘(後天八卦), 음양오행(陰陽五行), 10간(干) 12지(支), 28숙(宿) 등을 통달해야 비로소 이기라는 분야에 접근이 가능하다. 그만큼 난해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이론은 익히고 어렵고 끝이 없어 극히 일부의 학문을 도용하고 익혀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형기가 공간의 문제라면 이기는 시간의 문제다. 공간이라는 X좌표와 시간이라는 Y좌표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 어디인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 산의 관상, 즉 형기에 대한 관점은 대개 일치하지만 산의 사주, 즉 이기에 대한 관점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풍수를 이야기 하는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다. 특히 이기는 심하다. 그래도 형기는 일정한 틀이 정립되어 어느 풍수나 형기를 익힌 풍수는 비슷한 이야기, 혹은 이론의 유사상이나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을 준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형기학파(形氣學派)에 관한 책은 진서(眞書) 아닌 책이 없고, 이기학파(理氣學派)에 관한 책은 위서(僞書) 아닌 책이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이기학파에 관한 책들은 그만큼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다는 말이다. 복잡하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론이 구구하고 지나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학문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문제점이다. 풍수의 천재들은 대부분 이기학파 쪽에 몰려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기(氣)를 논함에 있어 형기학파가 단순명료하고 고대의 법칙에 더욱 근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형기를 익힌 사람은 형기가 주라 하고 이기를 익힌 사람은 이기가 주라 한다. 이미 오래전 조선의 황실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형기와 이기를 무시할 수 없지만 형기가 주가되고 이기가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황실이 철저하게 형기론을 바탕으로 왕묘를 조성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다리 하나를 이야기 하는데 지나치게 장황한 이론을 내세운 것 같지만 28이라는 숫자는 이미 유교의 이론이 들어오기 이전에 불교에서 사용한 이론이고 우리 문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첨성대가 28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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