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이 남아 있는 남하리사지
증평은 2003년 이전까지는 진천의 한개 면에 속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로 인해 2003년 비로소 군단위로 승격되었다. 증평사람들은 시로의 승격을 기대했지만 인구와 행정적 문제는 증평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증평이란 증천동의 증자와 장평(장뜰)의 평자를 따서 증평이라 불려지게 되었으며, 증평의 넓은 들과 하천의 이름을 복합한 이름으로도 통하는 함축적인 지명이다. 이름에 걸맞게 증평은 내륙이라는 특징에 어울리지 않게 넓은 뜨락에 세워져 있다.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한 증평은 삼국시대(4세기)에는 백제의 영토였고, 5세기에는 고구려, 6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특히 5-6세기에는 삼국세력이 교차 되었던 전략적 요충지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융성한 불교문화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조상의 슬기로 이루어진 값진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남하리 사지는 증평읍 남하리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흔히 이곳을 둔덕마을이라 부른다. 둔덕마을은 논밥둔덕이 라는 별칭을 갖고 있고, 전주이씨 효령대군 참판공파 집성촌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쯤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자 이정이 낙향해 6형제를 낳아 마을을 형성하면서 후손이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전부 남하리 사지는 아니며 유물로는 석조미륵만이 남았다.
남하리 사지를 찾아 나섰다. 제법 넓은 구역이라 들었다. 행정구역산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 라고 한다. 제법 넓은 마을이라 한내, 둔덕, 미륵, 양지말, 염골이라는 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며 낮은 지역에 동향하고 있다.
증평읍사무소 앞에서 증평중고 앞으로 도심을 통과하여 540번 도로를 탄다. 증평공고를 지나면 좌측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타나는데 청안면으로 가는 592번 도로다. 무시하고 직진을 계속해서 초정약수가 있는 방항으로 간다.
이 540번 도로는 증평에서 초정약수로 이어지는 길인데 일전 가본 적이 있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몇 달전에 남차리에 잇는 신경행의 묘역을 관산하였는데 당시 시간이 부족하여 남하리 사지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었다.
540번 도로를 타고 증평중고 앞을 지나 1킬로정도를 가면 곧 대동리가 나오는데 이 대동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나오는 마을이 둔덕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미륵의 형상을 한 석조입상이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에 작은 간판이 세워져 있지만 잘 보이지 않아 신경을 써야 한다. 마을 깊숙한 곳으로 간다.
마을 중앙의 도톰한 기맥에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된 남하리석조미륵석불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증평군 증평읍 남하2리가 정확한 지명이다. 증평 시가지를 벗어나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가다 남하2리 둔덕마을, 또는 조금 더 지나 남하1리 솔모루마을에서 미륵마을로 접어들면 논·밭 사이 공터에는 세 구의 석불입상이 서 있다.
이중 가장 큰 불상은 아랫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으나 현재 땅위에 노출된 높이는 3m 50cm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뜸뿍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로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양각돼 있고, 오른손은 배 위에 붙었으며 연꽃을 쥔 왼손은 가슴에 올려놓고 있다. 통견(通肩)인 법의(法衣)는 두팔에 걸쳐 흘려내렸고, 배 아래에서 활모양의 주름이 조각돼 있다. 옷모양 등의 조각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 10세기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왼쪽에 세워져 있는 1m 30cm-1m 50cm 높이의 작은 불상들은 얼굴 등에 시멘트가 덧 붙여 있는 등 원형이 훼손돼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두 구의 석불은 제작연대가 다르고, 현재의 위치가 본래의 자리였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을 앞에는 미륵이 있다. 이마을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이면 떡을 해다 올리며 소원을 빌며 정성을 드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떡을 주워 먹으면 재수가 있다고 해 앞다퉈 미륵이 있는 곳을 달려가곤 한다.
이 미륵에는 전설이 있다. 미륵이 향하고 있는 남쪽에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하러 갔더니 부잣집 마님이 머슴을 시켜 시주 대신에 두엄을 한 삽 퍼주라고 했다.
스님이 잠시 후 다시 돌아와 “허허, 저기 보이는 미륵님을 뉘여 놓으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자, 이에 욕심이 생긴 부잣집 마님은 곧바로 미륵을 뉘여 놓도록 하니 미륵이 피를 흘렸다고 한다. 그 뒤로 부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미륵 슬하에 세 형제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두 분을 잃어버려 마을어른들이 십시일반으로 쌀과 돈을 걷어 굿을 했다. 한 분은 찾아서 옆에 모시고, 한 분은 지금까지 찾지 못해 마을어른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둔덕마을에서는 들노래 나들이 행사가 열린다. 2005년도에 성대하게 치루어졌으며 2006년에도 개최할 예정이란다. 2005『장뜰들노래 나들이』행사를 증평군 남하2리 마을에서 ‘05. 6. 4. ~ 6. 5.(2일간) 개최하였다. 행사에는 2003년 제11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장뜰두레놀이공연을 비롯한 구전농요경연대회와 우렁각시 모셔가기 등 증평지역의 친환경농업을 연계한 전통농업문화행사가 개최되었다.
보통의 경우 미륵이나 불상은 기맥을 타고 앞을 보며 세워놓는 것이 정상이지만 미륵이나 비보를 위한 다양한 호법신장의 경우 그 목적에 맞게 방향을 성정한다. 남하리석조미륵석불입상이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라보는 방향의 산자락이 낮아 바람이 들어올까 두렵기에 살막이 용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둔덕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약 200여미터를 가면 작은 간판에 남하리 3층석탑과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을 알리는 간판이 나온다. 이 마을 안쪽이 염골이다. 이 염골 뒤에 삼층석탑과 마애불이 있다. 마을 길로 끝까지 가서 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능성이 하나를 넘어 탑이 보이는데 걸어서 5분 정도 걸린다.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97호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이 자리한 곳은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35-2번지로 삼층석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증평읍 남하3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남하리사지에 자리한다.
괴산 남하리 절터는 염실마을에서 남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터에는 무슨 절이 있었는지, 그 절은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그냥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3층 석탑 바로 밑에는 후삼국시대에 통일을 위해 궁예와 싸우던 견훤이 지나가다 남긴 것이라고 전하는 큰 발자국이 남겨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곳에는 1954년까지 암자(庵子)가 있어으나 지금은 3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1호)과, 석탑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 남아있다. 이 마애불상군은 충북지방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삼존불(三尊佛)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傷)의 형식을 비롯한 여래입상(如來立像)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불상군이다.
화강암벽 세 면에 모두 다섯 구(軀)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 본존불(本尊佛)과 좌우 협시불(脇侍佛)의 삼존불을 두고 왼쪽에 여래입상이,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돼 있다. 마애삼존불의 본존불이 취하고 있는 통인(通印)의 수인(手印)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근교의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이나 비중리 석조여래입상의 수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삼존불의 중앙 본존불 아래 바닥에는 사각형의 우물을 파 놓았고, 그 주위에는 각종 불기(佛器)가 놓여 있어 지금도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왼쪽에 있는 여래입상은 남대산으로 오르는 길에 인접해 있어 하단부는 땅 속에 묻혀 있다. 지나치게 풍화되어 잘 드러나지 않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곳 다섯 구의 마애불상 모두 원만자비형(圓滿慈悲形)의 상호(相好)와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모두 생략돼 있어 이 불상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훼손과 부식이 심한 상태에 있으니 신라 말 9세기에서 1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옆에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어 보호철책을 두른 남하리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4.4m×3.4m×1.7m 크기의 자연 암반 위에 기단석이 생략된 채 한 면의 길이 1m8cm, 높이 35cm의 네모난 대석(臺石)이 놓인 1m65cm 높이의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대석의 윗면이나 옆면은 물론 탑신(搭身)에도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등 아무런 조식이 없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1층 탑신의 한 모서리 위에는 암석에서 돌을 쪼아낸 흔적이 남아 있고,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별도의 돌로 조성됐는데, 2층 탑신만은 1층 옥개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아래 옥개받침은 모두 3단으로 돼 있으나 각 층의 윗면에는 탑신받침이 없다. 3층 옥개석 위의 상륜부에는 노반(露盤)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지름9.5cm의 찰주공(擦柱孔)이 3층 탑신에 이르기까지 관통돼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흉년이 드는 경우 이 노반의 방향을 다르게 놓아 비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남하리3층석탑은 1994년 당시 충청전문대 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고려시대 인근 염곡소(念谷所)에서 많은 불을 다루면서 청안 남쪽의 높아지는 화기(火氣)를 누르고, 마을의 화재와 주민들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해 견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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