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 주천면 소재자 부근에는 철종대왕 태봉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빙허루가 가까운 곳에 있어 경치가 뛰어나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곳이다. 또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주천 사람들은 이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으니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철종 대왕의 태실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이미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철종의 태실을 찾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유연하게도 정선에서 장을 둘러보고 오던 중에 생각이 나서 들리기로 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해 찾아오기가 가장 쉽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접근하여 원주 아래 신림나들목을 나선다. 이 곳에서 88번 도로를 타는데 주천까지 바로 이어지는 도로고 불과 25킬로정도의 거리다. 88번 도로를 타고 주천으로 향하면 신림터널을 지나고 솔치고개를 지나야 한다. 솔치고개를 지나 약 5키로 정도를 가면 주천 입구다. 이곳에서 주천으로 들어가는 길이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안쪽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안쪽 길로 접어들어 천천히 길을 따라 오다보면 [영등포식당]이 눈에 뜨인다. 이 곳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면 좌측으로 안내 지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비석과 철종의 금표비가 있으며 빙허루를 알리는 간판도 있다. 만약 길을 잊으면 주천으로 들어가 빙허루를 물어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다. 금표비 옆으로 따라 올라가면 길은 갈짓자로 이어진다. 100여미터를 오르면 정면으로는 빙허루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운동시설이 나타난다. 이 운동시설을 지나면 철종의 태봉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우선 빙허루를 찾아간다. 빙허루는 주천면에서 주천교를 지나자마자 우측에 있는 망산(해발 304m) 정상에 위치한다. 빙허루는 주천(술샘)에서 30여미터 거리에 떨어져있는 철종대왕금표비 옆으로 난 망산 등산로를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빙허루의 위치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원위치는 옛날 원주 땅에 속하는 주천현 객관 서쪽 산정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누각은 1986년에 국회의원 심명보(沈明輔)와 군수 안구순(安球淳)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빙허루재건기(憑虛樓再建記)]에 누각의 전말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산 356번지에 위치한 빙허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이층누각이며, 여기에는 숙종과 영조, 정조의 어제시문(御製時文)과 어제필(御製筆)을 복제한 게판(揭板)이 걸려 있다. 빙허루는 주천현의 관아(官衙) 서쪽 산정(山頂)인 망산에 있었다. 누각이 있었던 곳은 깍아지른 듯한 석벽(石壁) 근처로 밑으로는 맑고 깊은 소(沼)가 있었고, 그 건너편에 있는 청허루(淸虛樓)와 마주보고 있었다. 빙허루 정상에서 바라보면 석벽을 따라 흘러가는 주천강의 맑은 강물을 따라 형성된 주천면 소재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누각은 멀리 바라보는 맛이 첫번째인데 빙허루는 주변에 거칠 것이 없어 첫번째 소임은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빙허루는 예전 현청 옆에 있던 청허루(淸虛樓)와 함께 마주보고 서 있었으나 지금은 빙허루만이 복원되어 주천을 내려다보고 있다. 청허루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빙허루에 올라보면 주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빙허루가 자리한 망산은 솔치고개 위의 694미터 비산에서 기맥을 뻗어 내려온다. 비산의 한 자락이 주천의 상부인 도천교 방향으로 뻗어 503미터의 설귀산을 이루었다. 설귀산은 인근 수주면의 주산이 된다. 비산의 기맥이 설귀산으로 뻗어가는 도중에 주천 농고교 앞의 산으로 융기한다. 이곳에서 갈라진 한줄기 기맥이 남향하여 망산을 이루었다. 망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빙허루는 조망이 뛰어나다. 그러나 풍수적인 면으로만 살펴본다면 현재의 위치에서 올라가는 계단 방향으로 조금 이동한 곳에 잉혈이 형성되어 있다. 면소재지를 바라보는 방향의 지각이고 밑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의 흐름과 위치적인 특징을 바라보면 법흥사에서 모아진 물이 요선정이 있는 부분에서 서만이강과 합쳐져지고 주천강이 되어 크게 만곡하며 흘러내려온다. 이 과정에서 산태극 수태극이 이루어져 상부는 수주면이 자리하고 하부는 주천면이다. 주천면은 물이 돌아 굽이치는 안쪽에 자리하여 주천면 자리가 천혜의 명당이다. 이 물은 크게 굽이를 치며 흐르는데 굽은 물이 망산을 후려친다. 이 물이 후려치는 앞쪽으로 빙허루가 자리하고 있다. 빙허루 앞에 혈심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 물은 직층으로 들어와 묘를 쓸 수가 없다.
빙허루에서 내려와 체육공원을 지나 바라보면 볼록하게 솟아오른 언덕이 보인다. 올라보면 둥근 모양의 정상이 나타나고 중앙에는 멧돌 모양의 돌이 다듬어져 놓여져 있다. 이곳이 바로 철종 임금의 태봉이다. 주천면 신일리 망산(望山)에 있는 태실봉(胎室峰)으로 1985년 11월 문화재관리국 고증에 의하여 철종대왕 태실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철종의 태(胎)를 어떻게 여기에 모시게 되었으며 언제 모셨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에 봉안된 태실 역시 정양리에 있는 정조의 태실과 마찬가지로 1929년 당시 이왕직(李王職)에 의하여 수거되었고 지금 그 자리에는 개석(蓋石) 한개와 금표비(禁慓碑)가 남아 있어 이곳이 태실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당시 이왕직에서 수거한 철종의 태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소재하고 있는 서삼릉(西三陵 : 철종, 중종계비, 인종) 경내에 따로 묻고 각각 표석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빙허루에서 크게 굽이쳐 내려온 기맥은 태봉에 이르러 다시 한번 용으로 승천을 한다. 그사이의 길이가 약 30여미터이니 전형적인 사두형(蛇頭形)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체육공원으로 조성한 방향으로 보룡(保龍)으로 상징되는 작은 기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종 입금의 태실봉은 대단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굽이치는 용의 형상은 수려하고 입수룡에는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입석이 있기는 하나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며 전순과 좌우측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태실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지 않다.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면 천하의 대지로 보아도 좋을 도반을 넘어 국반에 이르는 명당으로 판단되므로 묘역을 조성하여 인제를 잉태시키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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