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산 411번지에는 청원 산덕리 태실로 알려진 인성군의 태실이 있다. 찾아가는 길은 문의문화재단지에서 월리사를 찾아가는 길과 동일하다. 문의문화재단지에서 괴곡리삼거리를 직진으로 지나 문덕리의 월리사를 향해 가다보면 청남대로 들어가는 길 입구를 지나 계속 가면 산덕리다. 산길을 따라 높고 낮은 길을 달리다 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큰 고개 하나를 넘으면 오른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산이 보인다. 이곳이 산덕리인데 산 정상에 작은 비석과 봉분이 보이고 올라가 보면 이곳에 태실임을 알 수 있다. 태실은 왕가의 태를 묻던 석실로 태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손의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임시로 설치하여 안태사로 하여금 명당자리를 찾아 태를 묻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가에서 아기의 태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좋은 명당을 찾아 묻을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곳은 태실이 있으므로 태봉이라는 산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 안에 묻힌 태함은 반구형의 개석을 갖춘 원통형으로 석회암으로 된 석함과 개석을 별도로 조성하여 태항아리를 봉안하고 봉분을 조성하였다. 석함은 직경 118㎝, 높이 76㎝로 바깥면을 다듬고 안에는 직경 64㎝, 깊이 58㎝의 내실을 마련하였으며, 개석은 직경 119㎝, 높이 63㎝의 반구형으로 4귀를 돌출시켜 태함의 4귀와 맞추게 되어 있다. 이 태실의 주인공과 건립시기를 명기한 태실비는 석회암제로 비신과 비수는 동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비수 상단의 연봉형 장식은 결실되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나 ‘만력십육년무자’에 세운 아지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판독되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 태실과 태실비는 1928년경에 도굴된 후 유실되었던 것을 1994년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태봉은 전국적으로 산재하고 있다. 일본의 강제점령시기에 한국의 맥을 끊겠다는 풍수침략의 일환으로 태봉을 폐쇄하고 태실을 부수었으며 테비를 옮기기도 했으나 아직 많은 태봉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태를 풍수지리에 맞추어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의 태봉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이미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태봉은 우리나라 고유 풍수 현상인지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풍수에서도 비슷하거나 똑같이 나타난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조실록》(현종 11년 3월 19일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를 편안히 모시는 제도는 옛날 예법에는 보이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다가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영지로 만들어 농사를 짓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마치 왕릉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임금부터 왕자와 공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봉이 있으니 우리나라풍속의 폐단으로 지식인들이 이것을 병으로 생각하였다.” 이 글에 의하면 눈에 뜨이는 대목이 있다.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운운!”이다. 경험으로 보아 반드시 들판 가운데는 아니지만 태봉은 둥근 혈상, 즉 벌판가운데의 둥근 형상이나 이와 유사한 형상에 모셔진 경우는 아주 많았다. 이와 같은 형상을 지닌 혈상은 사두혈이나 돌혈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국적으로 왕이나 대군, 공주, 옹주의 묘는 대부분 좋은 혈에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반드시는 아니어서 형편없는 곳에 모셔진 경우도 있다. 이렇게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풍수지리의 핵심 이론이기도 한 동기감응론을 따른 것이다. 동기감응은 풍수에 있어 음택의 제일 조건이다. 즉 동기감응의 의미는 동질성을 지닌 사람에게 땅속의 기운을 받은 유골이나 태가 동질성을 지닌 후손이나 본인에게 전해진다는 의미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둘째, 기존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왕실은 정권은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고민하는데 그 한 가지는 좋은 묘에서 나오는 동기감응의 기운을 얻는 것이고 왕가보다 더욱 좋은 묘를 써서 힘이 세어진 자들이 나타나 왕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묘를 잘썼다는 이유만으로 구족이 멸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세종대왕의 묘처럼 좋은 혈은 빼앗기기 쉬웠고 강한 힘을 지닌 돌혈의 경우에는 거의 빼앗기는 것이 당연했다. 셋째, 왕릉이 도읍지 100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의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다. 왕조의 음택을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때문에 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태실로 정해진 명당들은 거의 대부분이 풍수지리학상 돌혈(突穴)에 속한다. 돌혈이란 풍수지리학적으로 분류하는 네 가지 혈상(穴象)중 하나다. 아무리 많은 이름을 지어준다 해도 결국은 이 4가지 혈상의 범주에 들고 있다. 이 네가지 혈상은 각각 유혈(乳穴), 겸혈(鉗穴), 와혈(窩穴), 돌혈(突穴)이라 부른다. 반드시 그런것이라고 할수 없지만 태실은 대부분 이 가운데 하나이다. 평지돌출로 형성된 돌혈은 마치 무쇠솥을 엎어 놓은 형상, 혹은 바다위에 거북이가 둥둥 떠 있는 형상인데, 정읍에 자리한 인촌가문 17대 조모인 민씨부인의 묘는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형상이다. 이밖에 도 서산의 명종 태봉은 가장 돌출된 형상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태실이 돌혈이라는 혈상에 모셔지지만 반드시 돌혈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이곳 산덕리에 자리한 인성군의 태실은 돌혈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보아 돌혈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각이다. 돌혈은 사유(四維)에 지각(地角)이 나와 마치 영어의 X자처럼 지각이 앞뒤를 받치고 있어야 하나 산덕리 태실에서는 그와 같은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좌우 옆으로 두개의 지각이 앞을 향해 뻗어나간 형국인데 이는 전형적인 귀성(鬼星)에 해당한다. 인성군의 태실로 보여 지는 이 산덕리 태실은 비룡형의 유혈이며 좌우로 귀성이 맺혀 두개의 혈심(穴心)이 추가로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혈상은 양평군 옥천면의 정정옹주묘가 있다. 정정옹주 묘는 그 시아버지의 묘가 정돌취기입수라는 것이 비룡형의 산덕리 태실과 다르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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