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과 춘천의 경계지역에 자리한 가리산 중턱에는 천자묘라 불려오는 무덤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북산면 소재지가 있는 오항리에서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내평리에서 부터다.
소양호변에 자리한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는 한때 매우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에는 400호 안팎의 가구가 모여 살던 면소재지로 춘천에서 양구, 인제로 들어가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제는 아홉가구만 사는 쓸쓸한 산골마을로 쇠락한 이 마을에서 천자묘 이야기는 비롯된다.
비록 춘천시에 속하지만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홍천으로 난 버스를 이용해야 하고 지리상으로도 홍천에 가깝다. 그러나 추곡터널이 열리고 양구로 가는 길이 열리면서 내평리는 춘천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닌 셈이다.
아무튼 괴거에는 산넘고 물 건너 찾아가야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평리라고 불리는 이 마을을 춘천이 아닌 홍천으로 인식했을 정도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지금의 천자묘로 알려진 묘는 내평리가 아니라 물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과거에는 이곳이 내평리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소양호에 가로막혀 있다.
물로리에 있는 묘가 한천자의 묘로 알려진 이면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한(漢)씨 성을 가진 머슴이 이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두 명의 스님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방이 없으니 머슴방이라도 괜찮으면 자고 가라” 주인은 그같이 말했다. 물론 머슴이 그들을 안내했고 쭈구리고 스님들 곁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방에 들어간 스님들은 머슴에게 계란을 구해달라고 했다. 머슴은 스님들이 고기를 못 먹으니 달걀이라도 먹으려는 줄 알고 계란을 삶아다 줬다.
이와 비슷한 전설은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화는 비슷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날 밤 머슴은 잠결에 스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이야기 즉슨 그들은 가리산에 있다는 명당터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명당이라! 머슴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을 것이다.
스님들의 이야기를 추론하면, 가리산에 있는 명당의 묘터에 계란을 파묻고 축시(丑時)에 부화해 닭이 울면 천자가, 인시(寅時)에 울면 역적이 날 자리라고 했다. 엿듣는 처지라 머슴은 차마 삶은 계란이라는 말을 못했다. 그러나 흥분으로 인해 가슴은 뛰고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을 것이다.
이튿날 스님들이 바랑을 메고 길을 출발했다. 내평리에서 출발했는지 물로리에서 출발했는지 알기는 정확히 어렵다. 머슴은 그들을 몰래 뒤따라갔다. 전설에는 그들이 소양강을 건넜다고 하니 내평리일 것이다. 당시는 소양강이 지금처럼 호수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리 어렵지 않앗을 것이다. 스님들은 소양강을 건너 물로리로 들어가더니 산세가 좋은 곳에 이르러 계란을 파묻었다.
그들은 밤을 지새며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삶은 달걀이니 닭이 운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축시는커녕 인시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님들은 실망했다.
“역적도 천자도 아니 나겠다. 닭이 축시에 울어도 금으로 관을 쓰고 황소 100마리를 잡아 제를 지내야 하니 웬만한 사람은 묘를 쓸 수도 없을 것이다.” 스님들은 허탈해 하며 산을 내려갔다. 집에 돌아온 머슴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묻기로 했다. 천자가 되든 역적이 되든 종놈의 신세보다는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는 꾀를 내어 금관(金棺) 대신 노란 귀리 짚으로 시신을 싸서 묻었다.
하지만 제 몸보다도 귀한 황소를 잡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소는 큰 재산이었는데 당시 소의 귀함은 말해서 무엇하겟는가? 그런데 무덤을 다 쓰고 쉬고 있자니 몸이 가려웠다. 머슴은 옷을 걷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토실토실한 이를 100마리도 넘게 잡았다. 황소 대신 황소만한 이로 제를 지낸 셈이었다.
며칠이 지나 밤중에 뇌성벽력이 치는데,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싸서 빨리 집을 떠나라.” 그러한 소리였다. 머슴은 느끼고 있는 바가 있었고 마음을 조이고 있었으므로 처자를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다. 얼마 후 폭우에 내평강이 마을을 치고 나가 새로운 강을 만들었다. 목숨을 구한 머슴은 북으로 발길을 재촉한 끝에 중국에 닿았다.
그때 중국에서는 천자가 죽고 후대가 없어 새 천자를 구하고 있었다. 관리들이 짚으로 된 북을 매달아놓고 오가는 이들에게 쳐보라고 했다. 천자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머슴이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관리는 머슴의 어린 아들더러 말했다.
“너도 사내니 한번 쳐봐라.” 쿵! 아들이 북을 치자 요란한 북소리가 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머슴의 아들은 천자에 올랐다. 전형적인 전설의 플롯을 따르고 있지만 이는 전설화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고 전설대로 이 묘의 후손이 황제가 되었다면 다른 역사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로리의 박치관씨가 구술한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의 흐름에 따르면 한씨 머슴이 살던 마을은 [한터]가 되고, 그 묏자리는 한천자(漢天子)묘가 됐다. 지금도 풍수인 사이에서는 한천자 묘라 부른다. 그러나 지금에는 내평리 한터마을은 수몰됐고, 지금은 한터라는 지명만 지도 위에 겨우 남아 있다.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그 묘를 단장하려고 왔지만 산이 깊어 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천자묘가 있는 물로리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우선 가장 편한 길은 소양댐 선착장에서 인제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다. 소양댐 선착장에서는 청평사와 양구행 여객선 외에 관광유람선을 운항하는데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과 주변 경관이 잘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댐 정상에는 식당, 커피숍, 기념품가게, 휴게소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댐 위에 주차장이 있으나 그리 넓지 않아 주말에는 진입이 금지되므로 댐 아래 주차장에 차를 놓고 무료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소양호선착장에서 물로리행 여객선을 타고 약 50분가면 물로리선착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을 내려야 하는데 은주사에 인연이 있어야 오르기 편하다. 만약 인연이 없으면 걸어가야 하는데 그 거리가 마만치 않다. 더구나 은주사 부근에는 장뇌삼 재배단지가 있어 마을 사람들에게 불쾌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다른 길은 춘천에서 46번 도로를 타고 배후령을 지나 간척에서 추곡터널을 지나 양구로 가는 길을 타고 가다가 추곡리에서 북산면 소재지로 방향을 틀어 들어간 다음 내평리 한터로 간다. 물론 이곳에서 물로리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한다. 인연이 없다면 힘이 드는 코스가 될 수 있다.
차로 가는 길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홍천으로 가야 한다. 홍천읍에서 양구, 인제로 가는 44번 도로를 타고 향하다가 화촌면과 두촌면을 지난다. 두촌면 사무소가 있는 마을을 지나 약 1킬로미터 정도를 지나면 원동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과거에는 입구가 잘 보였으나 2006년 현재는 4차선 공사로 인해 입구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원동리라는 마을 입구를 잘 살펴 진입해야 한다.
원동리 입구로 들어가 약 3킬로미터를 가면 길이 갈라지는데 좌측의 큰길로 가야 한다. 이 길의 이른은 조교로다. 즉 조교리로 이어지는 길이기에 조교로라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홍천고개라고 하는 큰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어간 다음 약 5킬로정도를 가면 길이 갈라지는데 좌측으로 은하사로 가는 길의 표시가 있다. 직진하면 조교리다.
갈라진 길에서 좌측 길을 이용해 진입하여 1킬로미터정도를 가면 삽다리고개라고 불리는 높은 고개를 지나게된다. 3년전에 포장한 길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으나 제법 높은 고개다. 이 고개를 넘으면 장촌말 아래 도착하는데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선착장이고 좌측은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서 직진이다. 계속 진입하여 절골 방향으로 간다. 절골로 들어가면 시멘트 포장길이다. 곳곳에 암자가 몇 개 있으나 무시하고 은주사 방향으로 간다. 어느정도 들어가면 비포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들어가면 물 옆에 관음보살상이 보이고 그 옆으로 길은 계속 이어진다. 길은 험한 편이지만 차가 다닐 정도로는 충분하다. 계속 올라가면 여승이 계시는 은주사에 도착한다.
한천자묘는 물로리의 양지말에서 고깔바위 앞을 지나 은주사에 닿은 뒤 가리산 정상쪽으로 10분쯤 더 올라가 길가에서 찾아낼 수 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신각을 지나고 곧 정면으로 나온다. 중앙으로 내려온 기맥 끝자락에 있다.
마치 우물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산들이 주변을 에워쌌는데, 묘 앞쪽으로 산자락이 열려 있다. 묘는 뱀꼬리처럼 능선 자락이 끝나는 곳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약간의 흙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암반이다. 묘역 아래와 뒤도 돌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 안에는 넓다란 바위가 신기하게도 누워있는 사람 형상으로 파여 있어 자연스레 석곽 구실을 한다. 동네사람들은 날이 가물고 마을에 흉한 일이 있을 때 몇 차례 묘를 파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시신들이 발견됐다. 묏자리 덕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래 묻어둔 시신들이었다.
천자묘 전설은 삼척에 있는 준경묘 전설과 비슷하다. 준경묘는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그의 부친을 모신 곳이다. 이안사는 왕손을 얻게 될 명당터라는 스님의 말을 엿듣고 금관 대신에 보리짚을 쓰고, 100마리 황소 대신에 흰소(白牛)를 제물로 썼다.
한천자묘는 아직도 신성하게 여겨져 개고기나 비린 고기를 먹고 이곳에 오면 화를 당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도 해마다 천자묘를 가장 먼저 벌초한 사람은 산삼을 캔다는 얘기가 있어 심마니들이 성지로 여긴다. 그 때문에 천자묘는 떼가 자랄 날이 없다.
천자묘 아래쪽에는 부서진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을 돌탑처럼 쌓아둔, 옛 영화를 알 길이 없는 절이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연국사인데, 언제부터인지 은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절은 바로 이 한천자묘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은주사 아래에 있는 고깔바위는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이름난 곳이다. 잘 단련된 근육질 몸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바위 앞에 어른 키만한 바위가 벗어놓은 고깔처럼 놓여 있다. 고깔바위 위쪽에는 여근(女根)바위도 눈에 띈다. 바위틈에서 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구멍이 파져 있어 70명쯤이 온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로리는 가리산 등반의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소양댐에서 아침 배를 타고 물로리로 들어와 은주사와 천자묘를 거쳐 가리산을 오른다. 옛날에는 은주사가 아니라 연국사라 했다. 산을 내려올 때는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 계곡으로 넘어가면 차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옛날 천자는 부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사신을 보내 부친의 묘소를 찾았으나 묘소가 한국에 있다고 전해지면 속국이 될까 두려워 "한국에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속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씨는 묘소가 명당이라고 알려져 그 곳에 묻으면 후손이 출세한다고 해서 암매장이 성행했고 암장을 하다가 수많은 시체를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산삼을 캐러 가는 사람은 한천자 묘소에 제를 드리고 벌초를 하기 때문에 묘가 묵는 일이 없다고 한다.
한천자의 묘는 전체적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묘역위쪽과 주위로 흙이 덮여 있지만 파헤쳐보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묘역 뒤는 마치 주산처럼 부풀어 오른 돌산이다. 전형적인 취기입수의 형상으로 바위로 이루어진 정돌취기다. 다만 부드럽지 못하고 마구 뛰어나온 돌로 인해 충(沖)을 받는 곳이 아닌가 의심스럽고 때로은 두려움을 느낀다.
입수가 정돌취기일 경우는 모든 자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아울러 전체 당판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귀(貴)는 말로 형언하기 어렵고 유독 앞쪽 전순자락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자의 발복이 눈에 뜨인다. 단지 앞쪽이 열려 계곡이 제법 길기 때문에 바람을 타는 약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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