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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은 이색 선생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5-12 조회수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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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이색의 묘
이색의 묘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들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한산이씨 종중에서도 이색의 묘역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소문에는 중국까지 알려진 명당이라고 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색의 묘는 서천군 한산면 부근에 있다. 한산면 소재지에서도 들어갈 수 있지만 마침 서천읍에서 출발했으므로 도중에 들어가기로 했다. 서천에서 한산에 이르는 602번 도로를 타고 가다 영모리에서 문헌서원 간판을 보았다. 문헌서원 바로 곁으로 이색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주저없이 길을 들어섰다.
큰 길에서 좌측으로 논밭 사이로 난 길을 탄다. 입구에 돌로 문헌서원 입구를 알리는 글을 써 놓았다. 직진해서 약 1킬로미터를 들어가면 간판이 나오는데 직진하면 문헌서원이고 우회전하면 봉서사라고 한다. 봉서사는 약 1킬로 가까운 거리인데 봉서사 앞을 지나치면 한산면 사무소와 만나게 된다.
무시하고 문헌서원으로 다가가니 멀리서 서원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주차장이 잘 완비되어 있어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삼문이 덩그런 하고 좌우로 한산이씨들의 묘역이 깔려 있다. 삼문안으로 들어가니 정면과 우측으로 문헌서원이 있는데 정면의 건물은 허공에 둥실 떠 있다. 양택에서 바닥이 뜨면 좋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람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니 나무랄 것은 없다.
한산면 소재지에서는 건지산성과 봉서사 앞을 지나 고개를 넘어 찾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문화재자료 125호로 지정된 문헌서원(文獻書院)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분을 배향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27년(1594)에 이곳에 건립되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2년에 한산(韓山) 고촌(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해(1611)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고 앞의 두 분과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 음애(陰崖) 이자(李자),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 등 다섯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에 따라 일시 철폐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을 해오다가 1969년 현재 위치에 재건하고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種德)을 추향(追享)하여 여섯 분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곧장 들어가며 바라보면 좌측에 이색의 동상이 있고 그 뒤면의 산으로 묘역이 보이는데 바로 이색의 묘역이다. 문헌서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묘역에 오르기전 신도비가 있다. 충남 문화재자료 127호로 지정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색선생묘 일원(충남기념물 89)에 있다. 1433년(세종 15)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뒤 1666년(현종 7)에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였다. 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비문에는‘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정면의 건물은 영정각이다. 보물 제 1215호로 지정된 이색영정(李穡影幀)은 한산이씨대종회에서 소유 관리중이다.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影幀)이다.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가 서천 영모영당(永慕影堂)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보관과정에서 초(초)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해 효종(孝宗) 5년(1654) 후손들이 2본을 모사하여 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예산 누산영당소장본은 1654년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 1601~?)와 유명한 화사(畵士)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목은영당소장(牧隱影堂所藏)의 소본(小本)은 비록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반신상(半身像)이지만 필세(筆勢)에 골격(骨格)이 감지되고 안면처리(顔面處理) 역시 섬세하여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고격(古格)을 견지하고 있다.
대본(大本)은 누산영당본 동형동규(同形同規)의 것으로 화폭 우측상단에 추근(椎近)의 찬문(讚文)이 적혀 있는데 1526년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제기(題記)를 썼던 영정을 1711년에 다시 개형(改模)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고식을 충분히 따르되 약간씩 내비치는 선양기(渲梁氣)가 이 초상화의 이모년대(移模年代)를 말해준다.
영모영당의 영정 역시 동일한 상용형식인데 화폭 우측상단에 권근(權近)의 목은선생화상찬(牧隱先生畵像讚)과 제기(題記)가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1755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은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나 창의의 묘사 등 표현 기법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는 이모(移模)을 거듭한 이유 외에 화사(畵師)의 기량이 못미친 때문으로 보인다.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화기(畵記)에 의해 조선 헌종 10년(1844)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예산 누산영당본과 동형동규의 본으로 서대(犀帶) 및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이나 연폭(聯幅)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화사에 의해 이모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색영정은 재세시(在世時)의 본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중기 일류화가의 솜씨가 노정(露呈)된 원본에 충실한 반신상과 전신상 역시 여말선초의 초상화 양식을 갖추고 있고 연대가 올라가는 원본에는 거듭 중모(重模)한 것으로 3본 모두 작품의 수준이 높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피사인물(被寫人物)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므로 회화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도비를 지나 오솔길을 약 100미터 오르면 작은 묘갈이 서 있고 묘역이 나타난다. 두개의 묘역중 뒤쪽의 묘역이 이색 묘역이다. 뒤가 넓게 퍼진 산줄기의 앞은 약간의 도툼함 모양이다. 언뜻 보아도 앞쪽의 도톰한 모습은 인작이 아니라면 전순의 모습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5)은 고려말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으로 려말선초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이곡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 (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 (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 (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지공부사(知工部事), 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 지병부사(知兵部事), 우대언, 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 동지춘추관사, 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역을 올라보니 앞쪽의 비석은 이종선(李種善) 묘역이다. 이종선(李種善)1368(공민왕 17)∼1438(세종 20)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부(慶夫). 색(穡)의 아들이며, 권근(權近)의 사위다.
1382년(우왕 8)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서민이 되고 멀리 귀양갔다.
1396년에 병조참의가 되었고, 1409년(태종 9)좌우사간대부가 되었는데, 이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의 비명문제로 인하여 동래진으로 귀양갔다. 그뒤 호조참의·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17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구암사와의 노비속공문제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18(세종 즉위년)한성부윤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인하여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의 교체 도중 호부(虎符)인수인계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해에 선위사(宣慰使)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가 되어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고, 1438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여 효자로 일
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뒤쪽이 이색의 묘이다. 이색의 묘는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는 묘역이다. 그러나 직접 찾아가 보면 고개가 좌우로 저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멀리서 보면 환하고 햇볕이 양명하며 용의 흐름이 보인다. 이는 명당의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묘역에 올라보면 역시 교쇄도 그리 나쁘지 않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 원인은 바로 묘역 자체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산세나 좌청룡 우백호, 혹은 주산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혈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선배 풍수사들이 명당임을 주장했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진 소장파 학자들이나 이제 막 배우고 자라나는 풍수사들은 욕을 먹고 자신의 이론이 부정당할까 두려워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색의 묘는 명당으로 보인다. 그러나 용(龍)을 제대로 살폈다면 조금 의심을 해 볼 것이다. 용은 강하고 돌출 되어야 한다. 특히 평지와 달리, 평야와 달리 산지룡일 때는 그 맥이 힘차야 하며 지나치게 좌우로 퍼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색의 묘에 이르는 용은 좌우로 넓게 펴져 있다.
혹자는 왕룡이기 때문에 넓다고 이야기 하는데 왕룡은 마치 새끼줄을 친친 감아놓은 것처럼 힘차고 일정한 높이가 있어야 한다.
이색의 묘는 명당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좌우로 퍼진 모습으로 입수룡이나 혈판의 모습 역시 희미하기만 하다. 이기론에서 파구의 방향이나 입수룡으로 살피면 명당이라 주장할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형화된 형기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흔히 형기학에서 입수가 지나치게 넓으면 삼자불배합이라 부르는데 이는 명당으로서 갖출 것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입수가 넓으면 취첩한다고 한다.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넓은 입수룡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많은 학자들의 이론을 단순한 이론으로 뒤집을 수는 없으며 역시 주장이나 이론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산도를 그려 이와 같음을 주장하였다 해서, 혹은 유명인이라고 해서 명당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인물됨이나 영웅적인 행위는 그의 윗대 조상의 묘를 찾아 분석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
타 가문의 묘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나 이는 가문에 흠집을 내거나 깎아내리고자 함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의 인물을 떠나 순수하게 공부를 하고자 하는 차원에서의 연구일 따름이다.
아무리 주변 사격이 좋아도 유골이 묻히는 당판이 좋아야 한다는 것인 당연한 이치다. 주장의 차이가 있고 배움이 낮아 이치의 몰지각이 있을 수 있으나 이색의 묘가 기맥을 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장승생기로 표현되는 풍수의 이치는 달성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소문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용이 지나치게 넓고 당판이 정형성을 잃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공부하고 되짚어 파악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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