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명당으로 알려진 권민수의 묘
과거의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도시였다. 서기 1314년 고려 충숙왕 원년에 전국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오늘날의 경상도가 탄생하였다. 이로 보아 상주는 경상도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큰 도시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200여년간 경상감영소재지로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임하는 등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부산·대구광역시 및 경상남·북도 전체를 관할하는 매우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였다.
지역적으로 기후가 온난하여 삼한시대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부산과 대구등이 발달함에 따라 상주는 외진 곳으로 인식되고 위축었던 도시였으나 여주와 구미간 중부내륙고속도로 및 상주와 청주간의 고속도로 착공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통 요충지로 부각되고 있다.
공검면(恭儉面)은 상주군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함창현(咸昌縣)의 지역으로서 함창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율곡(栗谷), 법구(法九), 부곡(釜谷), 오리(五里), 동막(東幕), 병암(屛岩), 봉정(鳳亭), 소정(小亭), 양정(楊亭), 오대(五台), 용호(龍湖), 판야(板夜), 화동(華洞), 역곡(力谷), 서당(書堂)의 16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페합에 따라 수상면(水上面)의 상흘(上屹), 하흘(下屹), 예주(曳舟), 중검(中儉), 하검(下儉), 광곡(光谷), 지평(地坪), 장계(長溪), 중소(中所), 하소(下所)의 10개 리와 수하면(水下面)의 여물리(余勿里) 일부, 외서면의 주산리(住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이 곳에 있는 공갈못의 이름을 따서 공검면이라 칭하고, 상주군에 편입하였으며, 중소, 하흘, 예주, 지평, 율곡, 부곡, 동막, 오태, 양정, 병암, 화동, 역곡의 12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동쪽은 함창면과 사벌면, 서쪽은 은척면, 남쪽은 외서면, 북쪽은 이안면에 닿아 있다. 공검면의 서부는 해발 450 m 이하의 낮은 산지로 되어 있고, 남동부는 구릉성 산지 및 평탄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고도 338m의 국사봉(國寺峰)이 있다.
경지는 1450ha이고 농가가 92.1%로 농업이 주산업이며, 계림(鷄林), 성원(成元), 상원(尙元)광산에서 무연탄이 생산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중학교 1 개교와 국민학교 3 개교가 있고 고려 명종때 수축한 공갈못이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농경지로 변하였다.
공검면은 상주시청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km지점에서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 39.533㎢으로 그 중 52%가 임야인 중산간 지대로 면중앙에 국사봉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사벌면, 북쪽으로는 이안면과 함창읍, 남쪽으로는 외서면, 서쪽으로는 은척면을 접하고 있다. 또한 김천·점촌간 포장국도(3호선) 3. 4km를 끼고 있으며 공검, 외서, 사벌, 상주의 농업 용수의 원천인 오태저수지(33만평)를 가진 곳이며 서북쪽으로 이안천이 흐르고 있다.
외지인이 공검면으로 찾아가기 위해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매우 편하다. 여주에서 구미 위쪽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개통된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교통량이 많지 않아 편하게 운전할 수 있는 곳에 속한다. 공검면은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나들목에서 가깝다. 공검면으로 찾아가려면 나들목에서 나와 요금소 앞에서 만나는 3번 도로를 타고 약 1.5킬로미터정도를 달리다 오른쪽으로 우회전하여 901번 도로를 타고 들어가면 공검면 소재지인 양정리에 도착한다.
공검면에에는 오래전부터 명당이 많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증거로 능골이라는 이름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능골, 혹은 능곡(陵谷)이라고 불리는 지명은 율곡리의 한 마을인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왕릉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능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는 왕릉은 볼 수 없고 잉어명당으로 알려진 명당이 자리하고 있다.
공검면에서 면소재지 앞을 지나 작은 냇물을 건너 율곡리로 들어선다. 율곡리는 제법 큰 마을이다. 여러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2차선 도로를 따라 달리다 오른쪽으로 돌로 만들어 세운 간판을 만나는데 율곡2리를 알린다. 그 옆으로 안동권씨검교공파조단소를 알리는 돌기둥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논 앞으로 다가가 보면 신도비가 검은 색으로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신도비의 거북이는 고개를 돌리고 묘역을 바라보고 있다. 흔히 잉어명당이라고 불리는 묘역이며 권찰도의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5월 13일, 인연이 있어 상주의 잉어명당을 둘러보고 관산할 수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 연산군때 대사헌을 지낸 권찰도의 묘가 바로 잉어 명당의 묘다. 그런데 관산중에 수소문을 하여 만난 후손에게 여쭈어보니 권찰도라는 이름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때 관여하셨다는 후손은 일대의 권씨 종중 묘를 모두 알려 주셨다. 그분은 이 잉어명당을 권민수(權敏手)의 묘라고 알려주셨다.
본관이 안동으로 가문의 19세에 해당하는 권민수(1466(세조 12)∼1517(중종 12))의 자는 숙달(叔達), 호는 퇴재(退齋)로 아버지는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권림(權琳)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친의 묘역이 있다.
묘역의 비석에 [퇴재(退齋)]라 쓰여있어 이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고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권찰도 묘라고 부르는데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권씨 문중의 자료에도 퇴재는 바로 권민수의 호로 적혀 있다.
권민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25년(1494) 별시 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 부수찬(副修撰), 정언(正言),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직언하였다가 유배되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소격서영(昭格署令),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집의(執義), 직제학(直提學), 왜인추고 경차관(倭人推考敬差官), 부제학(副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홍문관의 무기력함을 규탄하였다. 1516년 정월 25일에서 7월 16일까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재직하였으며 이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그의 행적은 남곤(南袞)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전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주산인 율곡산이 마치 병풍처럼 자리하고 하나의 용맥이 힘차게 내려와 마치 삼태기 안쪽에 담긴 곡식처럼 자리를 잡았는데, 그 안에 묘역이 있다. 우백호가 조금 길게 보인다.
묘역 아래에는 산을 향해 고개를 돌린 거북이가 그리크지 않은 신도비를 등에 지고 있으며 신도비 앞에는 산자락 끝, 즉 전순이 유려하게 이어져 있다. 그 아래 석판으로 만든 상석이 있는데 이는 묘역 위쪽의 상석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권민수의 묘터를 살펴보면 전순이 아주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순(脣)의 형상인데 그 모습이 마치 참새의 부리와 같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산서(山書)중 일부는 순(脣)이면 소혈(小穴), 전(氈)이면 대혈(大穴)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나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즉 전순의 모습은 혈판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나 반드시 발복과 혈상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잉어명당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의 명당에는 도선국사와 무학대사의 행적이 적지 않은데 이곳에도 무학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잉어명당을 점지했다는 무학이 조선조의 수도 한양을 소점한 무학대사인지는 알수 없다. 아무튼 무학이라는 지관이 현재의 잉어명당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고 한다. “이곳은 명당자리요, 부디 너무 깊이 파지 말고 묘를 쓰시오” 지관은 특별히 당부하면서 자손들에게 퇴제의 무덤자리로 잡아주고 무덤을 두자 이상 깊이 파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퇴제의 자손들은 관을 깊이 묻는 것이 자손들의 도리라 생각하고 지관의 당부를 무시하고 깊이 파내려 갔다. 석자쯤 팠을 때 갑자기 큰 잉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앞에 있는 연못으로 들어가 버렸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 연못의 물을 퍼내고 잉어를 다시 잡아내려고 했으나 잉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입관을 했다. 그래도 그 이후 그의 자손들은 손자까지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 때 명당 앞의 잉어가 들어간 연못을 메웠더니 그 앞들은 해마다 가뭄이 들어서 다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잉어 무덤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다음해 부터는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트랙트와 같은 장비를 이용하다보니 잉어묘는 흔적이 없어지고 산 밑에는 옹달샘만 남아 있다. 산 아래에서 종파의 종가댁 후손을 만났는데 약 1000평 규모의 논자락을 파내어 잉어못을 만들려고 한다고 한다.
잉어명당은 전형적인 유혈이다. 좌우측의 사격을 따져보면 백호는 조금 위쪽에서 갈라져 길게 뻗어나서 수구를 막고 있지만 조금 짧다는 느낌을 준다. 청룡은 입수부위 위쪽에서 바로 갈라져 마치 용맥이 붙은 듯 보인다. 이 붙은 부분에 아주 작은 골이 잇어 그 구별점을 보여주는데 이곳에 땅을 평평하게 펼쳐 묘를 만들어 아주 작은 계곡으로 보이는 인후부(咽喉剖)를 가리고 있어 눈에는 잘 뜨이지 않는다.
율곡산에서 개장하여 중출맥으로 내려온 모습은 전형적인 산도와 다르지 않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삼태기가 팔을 벌려 잉어명당을 에워싼 형국이다. 산세와 교쇄로 보아서는 매우 뛰어난 형국이나 혈판 자체는 아주 뛰어난 형상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전형적인 혈로서의 의미와 모습, 그리고 특징을 지니고 있다. 좋은 혈이다. 찾아가 보고 공부할 가치가 있는 혈로서 잉어명당이라는 전설이 생길 것도 같은 그런 곳이다.
특이하게 묘하에도 상석이 있어 후손께 질문을 던지니 과거에 상감이 이곳에 내려와 제사를 지닌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상감이 위쪽, 즉 묘 앞의 상석에서 제사를 지내었기 때문에 그 후손은 감히 불경을 저질러 나란히 설 수 없으므로 묘하에 상석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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