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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횡성 김순이 여사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5-18 조회수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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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철죽이 아름다운 김순이 여사의 묘

횡성에서 갑천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19번 도로다. 홍천을 거쳐 인재로 이어지는 지방의 중심도로이며 횡성에서는 횡성호를 가로지르는 도로다. 횡성에서 19번 도로를 타고 약 10여키로를 지나면 옥동리 끝을 지나 마룡재를 넘어서는 끝지점 왼쪽 산기슭에 김순이 여사의 묘가 있다. 양 옆으로 산자락이 나와 게곡 안에 자리하고 있어 잘 보이지 않고 2006년 5월 현재 간판은 지워져 있어 때로 지나치기 쉽다.
묘역 앞에는 차를 세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산자락 아래 자리를 잡은 묘가 보이고 흑오석 비석이 보인다. 그 앞에 넓게 퍼진 철죽이 보이는데 백색의 아름다운 철죽이다.
들어서 보면 두개의 묘가 있고 앞쪽의 묘가 여사의 묘다. 여사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감동적이다. 여사께서는 1878년 10월 15일 경주읍 서부리 김해김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1898년 10월 19일 안흥면 안흥리에서 박영화 씨와 결혼하여 횡성읍 옥동리와 갑천면 구방리를 거점으로 가난과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애국의 일념으로 생활하시다가 1952년 12월 19일 한 많은 삶을 마치셨다.
기골이 장대한 여사(일명 황소아주머니)께 서는 뜻한바 있어 당시 천대받던 주막을 경영하면서 푼푼이 벌은 돈으로 애국지사이신 갑천면 화전리 최양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우셨고 자금 모금에도 협력하셨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특히 3,1운동 때에는 자신의 주막을 모의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하영현, 강달회, 강성순, 전한국, 강만형의사가 순국하시고 많은 지사가 투옥되었던 4월 1일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 때에는 일경에 쫓겨 장터 술집에 숨어 든 동지를 규합 군중을 진두지휘하다 투옥됨으로서 횡성 3,1독립만세운동을 성취시킨 전설적인 여인이다.
자손은 절손되고 난중에 소실된 기록을 챙기는 후사가 없어 찬연한 공적에도 보훈의 대열에 들지 못하고 갑천면 구방리 공동묘지에서 실묘의 지경에 이르니 실로 애석함을 금할 길이 없던바, 다행히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군민의 뜻이 있어 이곳에 안장하고 여사의 드높은 애국의 뜻을 기리며, 후세에 귀감을 삼고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여사는 초개처럼 스러진 한낮의 들꽃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의 충절과 애국심은 길이 빛날 것이다. 전국을 돌고 산천을 찾아 유물을 살피다 보면 정말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헌신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중절을 보이느라 자손을 가르치지 못하고 자신도 가꾸지 못했으며 가족을 돕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변변한 묏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친일을 한 자들은 친일의 대가로 생전에 영화를 누리고 민족을 억압하더니 막대한 황금과 지위를 손에 넣어 죽은 뒤에도 좋은 터에 안장되고 후손은 그 영향으로 외국에서 편히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분노를 느낀다.
친일한 자들을 응징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영가를 모시고 유해를 좋은 길지에 안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후일에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자손은 나라와 민족이 돌보고 민족의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김순이 여사의 경우는 어떤가? 이미 결과가 말해주듯 공동묘지에서 실묘되는 것을 찾아 겨우 지금의 장소에 모셨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사의 후손이 없고 그 역할을 추모하여 묘역을 정비하는 것으로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풍수적으로 판단하면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음택 풍수는 후손의 발복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발복이 아니라 효도고 조상을 모시는 것이다. 좋은 터에 조상을 모셔 혼백이 편안하고 체백이 편안하게 유지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여사의 묘는 어떤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력의 결과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공동묘지에서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보다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이유는 현재의 묘역이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사의 묘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평상시 물이 흐르지 않으니 계곡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묘역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계곡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묘역 상부는 두개의 지각이 갈라지는 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는다 해도 비가 오면 물이 흐르는 계곡이 된다.
두개의 지각이 좌청룡 우백호로 이해했다면 이는 참으로 난감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애초에 이장을 하고 자리를 잡으려 했다면 조금 더 사려 깊게 생각하고 이장을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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