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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현리 태실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5-25 조회수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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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홀로 버려진 산현리태실
산현리 태실은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원주는 예로부터 태실이 많은 고장이다. 오죽하면 태장동이라는 지명이 있겠는가 마는, 태장동은 태를 묻은 동네라는 뜻이다. 태장동에는 아직도 태실이 남아 있지만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원주 외곽에는 현재까지 2기의 태실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원주 서남부에 자리한 운산태실이다. 운산태실은 숙정과 숙휘옹주의 태실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산현리 태실은 문화재 지정도 되어 있지 않아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산현리 태실은 장현교를 건너 좌측의 산현 초등학교 방향으로 도로를 타고 약 0.7Km 정도 가면 왼편으로 있는 작은 산봉우리에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산현리 초등학교에서 용곡리 방향으로 약 700미터를 가는 모퉁이 위에 있다.
중앙고속도로 북원주 나들목에서 나와 좌회전하여 호저면으로 향한다. 중앙고속도로 밑으로 통과하여 호저면 입구의 삼거리에 다다르면 다시 우회전하여 길을 따라 중원교를 건넌다. 중원교를 건너 큰길을 따라 계속 가면 다시 고속도로 밑을 통과한다. 큰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드디어 섬강을 건너는 장현교를 만난다. 장현교를 건너 우회전하여 약 700미터를 가면 산현초등학교가 좌측에 있고 다시 700여미터를 가면 우측에 커다란 보호수가 나타난다. 보호수 주변에 벤치가 있고 좌측에는 산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잘 보이지 않으나 산자락에 몇기의 묘역이 위에 있어 산길이 있고 가장 앞쪽의 산은 작은 소봉(小峯)으로 소나무로 뒤덮여 있다.
밭을 거쳐 약 20미터 올라가 산길을 따라가지 말고 우측으로 옛날 길을 찾아야 한다. 태봉은 우측으로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산길은 묘역으로 사는 길이다. 올라가 보면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으나 흔하게 다니지 않아 중간부터 길이 있다 없다를 반복한다. 물론 도로에서 100여미터에 불과한 길이기에 길이 없다 해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올라가 보면 제법 넓은 터에 비석이 하나 서 있고 중앙은 움푹 파였는데 누군가 묘를 썼다가 파 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소봉은 해발 고도가 480미터인 소군산의 한 지맥이 흘러 내려와 평지 부근에서 조금 가라앉았다가 다시 약간 솟은 봉우리로 전면에는 장현천이 가로 질러 흐르고 있다. 밑 부분은 바위로 둘러쳐져 있는데 도로를 내며 드러난 바위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바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위로 둘러쳐진 부분은 계곡의 상부를 바라보는 지점으로 자연적으로 계곡에서 불어내리는 차가운 기운을 이기도록 되어 있다.
태봉의 상부를 살펴보면 약 20여평의 면적을 지니고 있는데 중앙은 움푹 파여 마치 묘역을 이장한 듯 보이며 전면으로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전면의 각자는 육안으로 거의 확인이 안될 정도로 마멸이 심하며, 전문판독은 되지 않으나 후면의 상태는 전면보다 양호하여 각자를 확인 할 수 있는 상태다.
비문에 의하면 이 태실의 주인은 [만력 28년]이라 적혀있다. 즉 1600년에 출생하였고 태실비는 그로부터 약 4개월 후인 이듬해 4월 25일 세워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영창대군의 태실이라고 하나 영창대군은 병오생(1606년)이므로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력 29년은 선조 34년(1601)으로 이 태실의 주인은 1600년 경에 출생한 선조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조의 자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선조는 24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왕자는 13명이며 공주는 1명이다. 그 밖에도 옹주10명을 두었다. 이 중 1600년(경자년)에 출생한 왕자나 후손은 온빈한씨 소생인 경평군이 있어 그의 태실로 추정된다. 이 마을 주민에 의하면 이 태실은 약 20년 전 도굴꾼들에 의해 석함과 덮개돌이 열린 채 파헤쳐져 있었으나 1996년에 원주환경운동연합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로 들어가 태실의 위치를 물었을때 마을 사람들은 쉽게 알려주지를 않았다. 석함이나 덮게돌은 보이지 않았다.
소군산에서 흘러내려온 지각의 끝부분이 비룡으로 고개를 쳐들어 이루어진 봉은 마을에서 태봉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다지 높지 않으나 기존의 조선시대 태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태봉은 대부분 돌혈(突穴)이거나 돌혈의 혈상과 유사한 형상의 혈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현리 태실도 주산에서 내려온 산이 마지막 지처에 다다라 살짝 고개를 처들어 돌혈과 유사한 혈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돌혈은 아니다. 기맥은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형상이고 혈장은 우측으로 매달린 전형적인 잉혈(孕穴)이다. 그러나 중앙이 파헤쳐진 모습으로 보아 석함과 태실을 구성하는 석물은 중앙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 또한 공통적인 것으로 전국의 태실이 이 같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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