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 관산일정
  • 관산기
  • 포토갤러리
  • 관산자료실

관산기

제목 북지리 마애불좌상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6-15 조회수 618
첨부파일
내용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북지리마애불좌상
국보201호인 북지리 마애불상을 찾아가려면 물야면 사무소와 영주시 부석사로 연결되는 915번 도로를 이용한다. 봉화읍에서 철길을 지나 약 4키로미터를 가면 좌측으로 국보201호 북지리마애불좌상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작은 시멘트 도로가 연결된다. 그리고 작지만 강 건너로 마치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의 산 아래 작은 사찰이 보인다. 2006년 6월 현재는 사찰로 이르는 주차장과 도로가 새로이 만들어지고,국보를 널리 홍보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자갈 모양의 돌이 많이 깔려서 어찌 보면 물이 아니고 돌뿐인, 그래서 만약 물을 건너간다면 물이 발을 적실까 말까 하는 얕은 강의 다리를 건너 한참 논둑길을 지나면, 586미터의 응방산에서 일어나 매봉산을 거쳐 내려와 앉아 있는 산줄기가 앞을 막는다. 2006년 현재는 이곳에 주차장을 만들고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이 산줄기를 배경으로 마애불 보호각이 있고, 보호각 안에는 높이 4.8m의 거대한 불상이 겸손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다. 이 불상이 바로 국보 제201호인 마애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1947년 6월 수월암을 짓기 위해 터를 닦다가 발견되어 본 불상의 보존 관리를 위하여 1982년에 목조 한옥 보호각 1동을 신축하였고, 1983년에 본 보호각에 단청을 실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도상으로는 절 표시가 아예 없거나 수월암이라 표기된 곳이 그 곳인데 한 스님께서 민간절을 매입해서 기거하시며 원래 명칭이었던 지림사(智林寺)로 고쳐 명명하고 불사를 일으키고 있다.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2리 657-3번지에 해당하는 이곳은 호랑이가 걸터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북지리 호거산에 자리하는 지림사는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현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명이 될 정도의 대 사찰이었던 지림사는 축서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문무왕 13년(673)에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 쪽을 바라보니 멀리 서광이 비취는 것이 보여 빛이 도달한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정조대(18세기)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묜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智林寺在文殊山)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계속하여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알 수 있으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혹은 축서사로 인해 사세가 기울었다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마애불 앞에서 살펴보면 여러 곳이 풍화되고 마멸되었어며 형체가 흐릿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복지리마애불은 잘 부서지는 사력암에 조성되어 그 형체를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마멸되었는데 신라 초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아미타 부처님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천년 세월을 노천에서 견디고도 남아 있는 곡선 부위나 골격에서 당당한 보습을 견지하고 있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잘 뜯어보면 좌우로 화신불이 보이는데 아마도 깨져나간 부 분까지 합쳐서 둘레에 여덟 분이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두 분의 좌우보처 보살과 광배에 새겨진 여섯 분의 화신불인지도 불명확하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은 보호각을 세 워서 비바람을 막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마애불을 살펴보면 높이가 4.8m의 거대한 불상으로 겸손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데, 이 석불은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감실 안 돌벽도 무너졌고 불상도 군데군데 떨어졌지만 부처님의 위용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상을 조성할 때 도드락(양각)으로 견고하게 새겼기 때문다. 더구나 네모진 얼굴의 내면적인 힘과 은근함, 병들고 불쌍한 사람을 보호하고, 중생의 마음을 평안하게 어루만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큼직큼직한 두 손은 불상의 정숙한 위용을 한결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두상의 광배가 깨어진 아쉬움이 남는다. 넓은 무릎과 무릎을 덮어버린 옷자락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불상 주위에 새긴 옛스런 부처들로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을 생각하게 하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새김 때문에 실제로 제작 시기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되고 있다. 위엄스럽고 자비스러운 불상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는 이 불상은, 큰 절 본존불답게 신라 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지림사 원통전 뒤쪽에도 마애불이 있다. 지림사 원통전 뒤쪽으로 가서 오른쪽을 살펴보면 커다란 바위가 산의 하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 바위에도 북지리마애불만큼 마모된 불상이 있다. 감실부처님으로 언뜻 보면 단독 불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삼존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바람에 마멸이 아주 심하다. 오래전에 조성된 마애불로 보이지만 문화재 지정은 되어있지 않으며 어떤 보호조치도 없어 계속해 풍화작용에 내몰린 상황이다. 조금 높이 조성되어 있어서 고개를 쳐들고 보아야 하는데 민간에서 조성한 것처럼 솜씨가 무디게 보인다.
그런 모양이 마멸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 아니면 진짜 후대에 무지랭이가 새긴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존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마구잡이는 아니고 오랜 풍화작용으로 무뎌졌으며 석질이 풍화에 약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정면에서 보아 우측으로 탑 모양의 구조물이 보인다는 것인데 진기한 마애탑이다.
멀리 떨어져 살펴보면 지림사의 위치는 마치 호랑이의 꼬리에서 복부에 이르는 부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머리는 지극히 높아 고개를 쳐든 형상이라 달리 사자 앙천형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보면 와우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머리쪽이 높다. 혹자는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술산이라 부르며 복록이 적지 않고 오래도록 명성이 오른다는 형국이다.
마애불은 꼬리부분에 새겨져 있으며 마치 힘찬 모양으로 말려 올라가 물이 내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지림사가 자리한 곳은 오목하여 주산 아래 보호를 받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지림사 앞으로는 물이 작기는 하여도 흐르고 있어 산으로 이루어진 사격대신 교쇄를 이루고 있다. 물의 방향을 돌리는 인작(人作)이 가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영향은 미치지 못할 것이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