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산임수의 법칙을 보여주는 외암마을 우리나라에는 민속마을로 지정되었거나 지정은 아니라 해도 전통마을로 알려진 마을이 적지 않다. 양동마을, 낙안읍성마을, 성읍마을, 하회마을, 왕곡마을, 그밖에도 많은 전통마을이 있는데 아마도 서울에 조성한 한옥 마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우며 전통이 살아있는 마을은 아산의 외암마을일 것이다. 2006년 06월 21일 아침 8시에 모인 6명의 회원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출발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이야기가 있었던 Q채널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Q채널에서는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다큐를 만들고 있었고 이 책의 내용 중 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중요한 부분에서 우리 풍수회원들이 출연하고 외암마을의 풍수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촬영이 진행될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오래전부터 계획을 했던 촬영이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 나들목을 나서 21번 도로를 타고 아산으로 향했다. 배방면소재지 부근에서 좌측으로 길을 바꾸어 623번 도로를 타고 가니 온양초등학교 앞에서 다시 아산시내에서 이어지는 39번 도로를 만났다. 이 도로를 타고 계속 가니 맹사성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지고 약 3킬로의 거리에 외암리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 대략 65가구가 살며 초가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외암마을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국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마을이다.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에는 약5백년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 외암리에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는 이미 500여년전에 강씨(姜氏)와 목씨(睦氏)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옛날 책에서도 강씨와 목씨가 이 마을에 먼저 살았다는 글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느 가문의 족보도 둘러보지 못했으니 이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무심코 넘어가지만 다른 가문의 족보에 이마을에 입향시기가 적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문과 전설은 진실의 단초를 지니고 있으니 이 마을의 구성에 대해서는 일견 수긍이 간다. 예안 이씨의 족보와 외암 이 간 선생의 외암기에 의하면, 원래 외암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대두된 학설은 아니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있는 분명한 사실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 마을 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인 구릉의 골말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의 주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왜 평택진씨의 흔적은 사라지고 전설이나 입향조의 이야기는 증발되고 구전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진한평 묘소의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50m정도의 위치에는 과거 그 위용을 뽐내었을 집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진참봉의 집터일 가능성이 높다. 영암군수댁에 걸려있는 열승정기 현판의 추기에 이사종이 세웠던 열승정이 촌곡(村谷)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촌곡 즉 골말이 바로 집터와 연못 흔적이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 이상은 예안이씨이며 외암마을이라 하면 예안이씨 동족마을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예안이씨로 외암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기시작한 사람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즉 입햐조가 이사종이라는 말인데 이때부터 진씨에서 이씨로 이 마을의 모든 권리와 구성 요소가 넘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진한평은 비교적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고, 사위인 이사종이 장인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외암마을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아주 많은데 부근의 맹사성 고택도 이전에는 최영장군의 저택이었으나 맹씨 가문에 전해진 건물이고 전라도의 유명한 명당인 말명당도 사위에게 전해진 명당지로 이름나 있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진참봉의 재산이 얼마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진참봉이 담배를 심었는데 관에서 조사하러오자 이를 숨기는데 모두 놋그릇으로 덮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고 진참봉의 재산을 확대하고 그 규모를 짐작케하기 위해 확대된 것으로 사실은 나중에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았던 16세기에는 우리 나라에 아직 담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양귀비나 나라에서 생산을 금한 무엇인가를 덮었다면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진참봉의 재산이 엄청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다. 아울러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진산을 이루는 설화산 3봉중 하나인 금형산의 영향으로 거부(巨富)가 날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기운은 앞으로도 여전하다. 진참봉은 딸만 셋을 두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맥이 끊어지고 외손봉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진참봉의 후손이 끊어졌어도 그의 묘소에 오늘날까지 예안이씨가 의령남씨 파평윤씨와 함께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도 진참봉 제사를 지내기 위한 농토가 12마지기나 된다. 이처럼 외손봉사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혹 여러 가문에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그 하나는 외손봉사는 가난하게 된다는 이야기와 반대로 외손봉사가 출세를 하고 재물을 도와준다는 것인데 어느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외갓집 조상 또한 후손의 일부분에 작용하는 뿌리이니 손이 끊긴 외갓집 조상을 모시는 일이 그다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권장할 일이다. 예안이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한 다음 진산인 설화산의 문필봉의 영향 때문인지 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서 큰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이 참판댁과 중요민속자료 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암군수댁(건재 가옥)은 아름다운 정원과 더불어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장소다. PD가 길을 잃어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기분 좋은 촬영이 시작되었다. 우선 주차장에서 전경을 촬영하였다. 팬의 기법으로 카메라를 스치듯 촬영하여 외암마을의 진산인 설화산을 담았다. 주차장에서 보면 멀리 마을의 주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설화산이다. 그리고 마을 앞은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통마을이라고 해서 모두 배산임수의 조건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전통 마을이 배산임수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하회마을 같은 경우는 배산임수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무튼 설화산은 크게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앞쪽의 산은 주차장에서 보면 기와집처럼 보이고 산의 가운데가 일자형(一字形)인데 언뜻 보면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보인다. 일자문성으로 보이는 곳에서는 일자문성의 영향을 받아 귀한 사람이 나오게 된다. 주산이 일자문성이라면 이 마을에 뛰어난 인물이 나오는 것은 불문가지다. 약간 방향을 틀어 마을로 들어가 보면 주산은 금형산으로 변한다. 풍수법은 상당히 시각적인 면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따라서 같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어느 위치에 집이 있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고 그 영향 또한 달라짐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이 초가지붕 모양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초가지붕 형태의 산은 금형산(金形山)이라 하며, 금형산은 흔히 노적가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노적봉(露積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달리 창고사(倉庫沙)라고 부른다. 금형산은 산세가 부드러우며 재산을 상징한다. 이 마을에 재산이 모인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로부터 큰 마을이나 대찰의 경우에는 금형산을 주산으로 삼아 터를 정하는 풍습이 있었다. 금형산 뒤에는 해발 441m가 되는 붓끝 같은 봉우리로 문필봉이라 불리는 산이 솟아있다. 즉 산 정상이 붓처럼 뾰족한 산인데 이와 같은 산은 매우 귀한 산형으로 본다. 문필봉의 영향은 문필가를 배출하는 것으로 과거에는 문장가나 과거에 급제하는데 있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현재도 유명한 작가의 고향은 이 문필봉이 적지 않다. 이곳에는 칠승팔장지의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투장이 성행하여 가뭄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문필봉 뒤에도 하나의 산이 우뚝 솟아있다. 그런데 이 산은 다른 산과 달리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모습이 세밀하게 보인다. 날카로운 바위가 하늘로 마구 솟아오르는 모양인데 이는 전형적인 불의 형상이다. 이와 같은 불의 형상을 지닌 산은 화형산(火形山)으로 불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에도 관악산이 화형산이기 때문에 많은 비보(裨補)를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물의 기운을 상징하는 해태상을 세우고 궁궐 내부에 크거나 작은 연못을 만들었으며 궁궐내로 명당수를 끌어들여 냇물을 돌게 한 것이다. 외암리의 경우에도 이 화형산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이므로 많은 비보를 하였는데 물과 나무를 이용한 비보풍수다. 이와 같이 외암리 마을 뒤로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좌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 물이 합쳐져 흐르는 이름하여 삼산양수지지(三山兩水之地)의 모습을 보인다.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는 명당국이다 외암리 입구에 난 돌다리를 향해 걸어가며 이 마을을 생각한다. 외암리는 온양읍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 1리. 이곳은 충청도 지방의 전형적인 반촌(양반들이 많이 사는 마을)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외암리는 조선시대 중엽에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정 일가가 이곳으로 낙향하면서 예안 이씨의 터전을 일군 것으로 옛 기록은 전하고 있다. 얼핏 따져 봐도 그 역사가 400년은 족히 넘는 내력이다. [외암]이라는 마을이름은 이정의 6세손인 이간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중에 강을 바라보면 여러개의 글자가 세겨져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글자는 [외암동천(巍巖洞天)]이라는 암각서다. 어느 시대에 쓰여진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나 이곳이 외암이라는 느낌은 확실하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좌측에 새로 조성한 물레방앗간의 모양과 그 뒤쪽 언저리 길 앞에 세운 장승이다. 현재 주차장 앞의 개울 건너 지어진 집들은 지극히 관광을 위한 건물들이므로 살펴보지 않기로 했다. 장승뒤로 나무가 많아 설화산이 잘 보이지 않지만 둘러보면 설화산 자락이 보이고 주위로 산들이 고리처럼 환포하고 있다. 뒤로는 설화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냇물이 보이는 이러한 배치는 마을의 위치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을 띠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양기풍수(陽基風水)의 택지소점이 드러나는 곳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나무뿌리를 위로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장승이 서 있다. 김제의 화소백련지로 알려진 청운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이와 같은 장승이 있었다. 장승은 마을의 이정표이거나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신앙과도 같은 구조물이다. 샤머니즘 문화에 깊은 뿌리를 둔 장승은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구조물로 오래전에 법수나 벅수로 불려졌는데, 영생을 의미하는 [장생 불사]의 도가 사상에서 따온 것으로 본다. 이 장생은 쉬운 발음인 장승으로 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법수나 벅수는 아직도 남쪽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달리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하르방, 천하 대장군, 수살, 돌미륵, 신장 또는 수살이라 부른다. 장승은 문화적 측면에서 풍수와 토템의 중간 단계를 점하고 있으며 풍수가 그 민족의 문화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마을 어귀를 지키는 장승이야 말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일종의 수살막이 역할을 하는 풍수적 이정표로 볼 수 있다. 외암마을 장승은 매우 아쉽지만 외암마을 고유의 방식은 아니다. 외암마을이 조성된 옛날에도 장승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이고 묵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외암마을의 정형화된 유물은 아니다. 하동 쌍계사에 가면 나무를 거꾸로 세워 뿌리로 머리를 삼은 유명한 장승을 보게 되는데 아마도 그 장승을 본떠 만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울러 장승은 근래에 세운 것이기는 하나 장승의 역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을 입구에서 반석다리를 건너면 장승이 세워져 있고 그 뒤쪽으로 있는 정자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비록 기와지붕을 올리고 휘황찬란한 멋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정형성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을 입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피악히고 앞의 너른 들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 지어진 정자라는 것이다. 이곳은 한여름이면 외암리 마을의 어른들이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기기도 하는 휴식처다. 정자 아래로는 마을의 젖줄인 외암천이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정자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중 풍수적인 것은 바로 마을로 들어서는 사람을 파악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위치에 지어진 정자는 역할에 손색이 없다. 정자 부근에는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도 이곳에는 나무가 자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나무에도 일종의 지혜가 담겨있다. 개울에서 바라볼 때 새로 지은 의도적인 관광지 모양의 물가 가옥들 뒤로는 약간 높아지며 마을의 집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서도 개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리에서 정면으로 들어가 보면 마을에서는 개울이나 마을 입구가 잘 보인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어 수세(守勢)를 이루었는데 이는 지극히 풍수적인 용도로 흔히 수구막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비보풍수다. 현재 수구막이 앞에는 산소가 있다. 이제 마을로 들어선다. 외암마을은 설화산을 주봉으로 그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서쪽의 어귀는 낮고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서저동고(西低東高)의 지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주택은 거의 서남향이며 간혹 남향도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주택들은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서 형성된 길을 따라 그 좌우로 샛길을 내고 있어 마치 큰 나무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 외암리는 유난히 돌담이 많은 곳이다. 물론 과거에는 더욱 많은 돌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최근에 쌓은 돌담이 많아 고색을 보고자 한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돌담은 이 마을의 상징과도 같다. 마을 입구의 정자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이 마을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고풍스런 돌담이 오밀조밀한 골목길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진다. 이 돌담들은 결코 위압적이지 않아서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박하고 편안한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이 마을은 반촌으로 알려져 있다. 반촌은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고장이라는 의미인데 약간 의아함이 머리를 스친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비교되는 부분인데 담이 지나치게 낮다. 옛날부터 양반들의 가옥 주위에 쌓여진 담은 천민이나 하층민이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최소 머리 이상의 높이를 지니고 있으며, 하층민은 양반들이 언제든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어깨 이하로 쌓는 것인데 이 마을은 양반 가옥인 기와집과 하층민 가옥인 초가집의 담 높이가 일정하다. 이는 아마도 마을을 제정비하고 새로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착각하거나 실기한 것으로 보인다. 혹, 양반이나 하층민이 너나 할 것 없이 다정하게 어깨를 두르고 살았다면 할말이 없으나 어울리는 형상은 아니다. 눈여겨 볼 것은 냇물이다. 돌담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으로 냇물이 파고들어 흐르는 것이 독특하다. 마을 안으로 냇물이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다. 즉 물이 많은 것은 병의 원천으로 보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수인성전염병(水因性傳染病)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곳곳에 물길이 지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풍수적인 발상이고 풍수적 목적을 지닌 것이다. 마을의 진산인 설화산이 불기를 내뿜고 있는 화형산이라 화기가 두려운 것이다. 양택지(陽宅地)를 에워싼 산은 정기를 마을에 불어넣어주는 것이며 오행의 형상에 따라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화형산은 강한 불기운을 마을에 보내주는데 풍수적 관점에서 화기는 매우 불리하다. 마을로 밀려 내려오는 화기를 막기위해서는 그에 대응하는 오행상의 수격(水格)이 필요하다. 바로 물이 필요한 것이다. 화형산이 뿜어내는 불기를 잠재우려고 마을을 휘감고 내려가는 개울을 집집마다 끌어들여 인공으로 물길을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작으나마 연못이 있는 것도 쉬이 볼 수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인데 특히 아산 건재 고택(牙山健齋古宅)은 영암댁으로 불리느 이 건물이야말로 위암마을의 상징과도 같다. 조선 숙종 3년(1677)에 현 소유자인 이준경씨 9대 선조인 위암(魏巖) 이간(李柬)선생이 출생한 가옥으로 증조부인 건재(健齊) 이상익(李相翼)공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하였다 전한다. 사랑채에 이간(李柬)공의 교지가 보관되고 있어 입향조의 근거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상익공이 전라도 영암군수를 지내 일명 영암댁 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건물배치는 설화산을 진산으로 하여 산세에 따라 서북향으로 하고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명당수를 마을로 유입하여 건재 가옥을 비롯한 마을 내 대부분의 반가 에서 정원수로 활용하고 있고 화재에도 대비하고 있다. 가옥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주축으로 하여 안채의 우측에 광채 좌측에 곳간을, 우측 윗 쪽에 가묘가 배치되어 있으며 가옥 주위에 자연석 돌담을 두르고 돌담밖에는 초가로 된 하인집이 있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학의 모양을 한 연못을 중심으로 작은 계류가 형성되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으며, 괴석으로 꾸민 거북 섬과 소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황매화, 옥잠화등으로 구성된 정원이 있다. 여러 가옥을 살펴보면 가옥 안쪽에 물길이 마치 작은 봇도랑처럼 흐르기도 하고 때로 작은 연못이 보이기도 한다. 집 밖으로 연못을 만들기도 하였고 내부에도 만들었는데 한결같이 물이 흐른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물은 풍수에서 좋고 나쁨을 모두 주는데 집 내부의 우물이나 연못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법이다. 즉 물은 고이면 부패하고 색이 변하기 마련이다. 물이 썩고 물이 고이면 나쁜 것이며, 물이 흘러 깨끗하면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물이 흐르면 썩지 않고 항시 맑은 물의 모습을 지닌다. 이처럼 맑은 물이야말로 좋은 수격(水格)이다. 풍수이법에서 물이 고여 있으면 색이 변하여 검거나 황토색으로 변하는데 이와 같은 색의 변화는 후손이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긴다. 즉 물이 있어도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인성전염병이라는 현대 의학의 설명과도 통한다. 외암리 마을의 곳곳을 흐르는 물은 고여 있지 않으므로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촬영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리저리 돌담을 따라 돌며 감탄도 하고 느낀 점도 많지만 안타깝고 애석하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점도 있다.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가옥들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눈에 뜨인다는 사실이다. 특히 담의 형태는 유지되었지만 범위나 가옥의 구조에 따른 복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곳이 많다. 그 이유는 각 가옥이 동사택과 서사택의 조건에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가옥을 보수하는 점에 대해서다. 급히 보수하려 한 탓인지, 혹은 들어가는 경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벽을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보수하거나 하는 방법은 보수가 아니라 문화재를 훼손하는 지름길이다. 이왕 보수하는 것이라면 전통의 방식을 이용하여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배산임수의 형국을 지닌 이 전통마을이 마을 상부에 논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마을이 산에 바싹 붙고 논이 마을 앞에 펼쳐지는 것이 일반론인데 이곳은 논이 마을의 위쪽에 있다. 이는 지극히 풍수적인 배치로 본다. 즉 기(氣)는 물을 만나면 그친다는 것이 풍수의 통설인데 설화산의 기운을 물의 기로 상충(相沖)하여 막아보자는 이치다. 즉 논의 물이 화기를 막는데 이용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비보하기 위해 마을 뒤에 적지 않은 나무들이 보인다. 이 나무들은 언뜻 보아서는 각각의 가옥을 감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역시 시각적으로 화기가 긷든 설화산의 일부를 가리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고 찾아가 볼 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촬영을 막 끝내고 마지막 이야기로 풍수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풍수는 자연이다. 자연을 이해하여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풍수이며 우리의 조상들이 지녔던 문화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바로 풍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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