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가 있는 바위틈의 사찰, 백련암(白蓮菴)
백련암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해인사 백련암을 연상하게 할 것이다. 20세기의 큰 스승이셨던 성철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련암이라는 이름은 전국적으로 적지 않은데 아마도 백련(白蓮)이라는 의미가 바로 불심을 의미하고 청정함을 나타내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도 백련암이 있다. 그다지 큰 사찰은 아니지만 근교에서 등산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사찰이다. 백련암은 광주시 도척면에 자리한 태화산(太華山)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있다. 곤지암에서 용인읍으로 이어지는 98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한 태화산은 규모가 작아 어느 방향에서 산행을 시작해도 3시간 이내에 등산을 끝낼 수 있는 산이지만 제법 높아 641m나 된다. 정상에서 남쪽방향 산자락에는 고려 충숙왕 때 일연선사가 창건하였다는 백련암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백렴안 대웅전 아래에는 전설이 깃든 장군샘이 있어 식수로 이용할 수 있다. 태화산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은 광주군의 남서변경에 위치하여 용인시와 접경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한 고을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 국도는 성남과 이천간 산업도로인 3번 도로로 가다가 소머리국밥으로 유명한 곤지암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용인으로 이어지는 98번 도로를 이용한다. 곤지암에 들어서 개천이 보이면 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큰 길이 도척면으로 가는 길이다. 태화산 옆에는 추곡저수지가 있어서 태화산의 풍치를 아름답게 하는 데 한몫을 한다. 추곡저수지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온다. 태화산은 작지만 제법 가파른 산이다. 태화산은 광주읍 남쪽 국수봉에서 시작된 능선이 쌍령리를 넘어 남하하면서 발이봉과 백마산을 솟게 하고 계속 남진하여 긴 능선을 형성하는데 크게 보면 이 능선상의 최고봉이 태화산이다. 이 능선은 태화사 위의 능선을 지나 말치고개를 넘어 용인시 양지면의 추계리로 이어지고 정수리 고개를 넘어 영동고속국도를 지나 나중에는 안성의 미리내성지 뒷산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이다. 98번 도로를 타고 달려 추곡저수지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백련암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나오고 1.1킬로미터라 적혀있다. 자가용 한대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시멘트 도로인데 입구가 찾기가 쉽지는 않다. 시멘트 도로는 매우 급하여 걷기도 쉽지 않으며 차를 타고 올라간다고 해도 1단 정도의 기어를 사용해야 한다. 초보자는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겨울철은 차를 끌고 오르기가 겁이 날 것 같다. 1킬로미터 정도를 오르면 산 중턱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다시 올라가는 길은 약 500미터정도이다. 직선거리는 그리 길지 않겠지만 경사가 심해 이리저리 비틀어 올라가는데도 숨이 차다. 풍수 회원들은 뒤쪽에 따르고 있는데 먼저 백련암을 찾아야 했다. 답사를 하지 않고 찾아온 길이라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길이 가팔라서 곧 코가 닿을 것 같은데 10여분 이상을 달리듯 올라가자 멀리 집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전기선과 전화선이 없었다면 매우 당황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결국 힘들게 올라가면 저절로 “화!” 탄성이 나온다. 요사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벼랑 같은 지세 위로 언뜻 보이는 종루, 그리고 작은 굽이를 돌아치니 바로 문화재자료 제53호인 백련암 부도(白蓮菴 浮屠)가 나타난다. 백련암은 1325년 고려 충숙왕 12년 일련선사(一蓮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1387년 고려 우왕 14년 혜안(慧眼)스님이 증축함과 동시 일련선사의 부도와 삼층석탑을 세웠으나 1807년 조선 순조 7년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가파른 곳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1925년 을축년 장마 산사태로 석탑이 매몰 되었고 그 일부인 석탑 상하부와 부도만이 현존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복원된 것이라는데 조금은 안타까기도 하다. 추곡리백연암부도 (楸谷里白蓮庵浮屠)가 자리한 곳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산25-1번지는 태화산의 최상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두개의 부도가 있는데 다른 하나는 어느시대 조성된 것인지 모르나 그리 오랜 세월을 지낸 것 같지는 않다. 백련암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낮은 받침을 두고,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앞면에 풀꽃무늬를 새기고, 양 옆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겼다. 그 위의 받침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으며, 이와 닿아 있는 탑신의 아래에도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둥근 받침대 위로 작은 규모의 머리장식이 얹혀 있는데, 받침대에는 줄지어 있는 구슬무늬가 둘러져 있고, 머리장식은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종모양의 부도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부도가 자리한 곳은 기맥이 용틀임을 하는 곳으로 비록 경사가 급하다고는 하지만 입수룡이 급할 뿐으로 인작이 가해져 그 모습이 변하고 약간의 축대가 보여 행룡간에 모신 듯 하지만 나무뿌리가 움켜쥔 바위의 형상과 좌측의 기맥 부근 바위로 보아 작으나마 이곳에는 혈심의 형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부도를 새운 것은 단순히 기맥을 찾은 것이 아니라 혈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백련암에 오르기 전에도 길가에 부도의 흔적으로 옥개석이 보이는데 몸돌은 보이지 않아 애석할 뿐이다. 요사로 지어진 현대식의 조립식 건물을 지나다 보니 뒤쪽에 석간수가 나오고 있다. 이 석간수가 장군샘이다. 맑고 청정한 물맛이 기가 막히다. 물을 마시고 둘러보니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사찰이 바위위에 올려져 있다. 그러나 백련암은 아직 계곡의 향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을 보니 나이를 먹은 나무들이 족지 않아 풍수적으로 계곡풍을 막고 축대를 안정시키는 목적으로 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사찰의 비보림이다. 계단을 올라 대웅전을 오른다. 대웅전도 바위틈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맥을 타고 있다. 대웅전이라고 하기 보다는 산신각이 어울리는 자리이기에 기도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대웅전 뒤로 우람한 바위가 산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옆의 한칸짜리 당우는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다. 대웅전 앞을 지나니 다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10미터도 오르지 않아 바라보니 어머어마한 바위가 있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도 좋을 공간이 바위틈에 있다. 호랑이를 등에기댄 산신이 나타난다, 동으로 조성한 산신의 모습이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준다. 습기가 많기는 하나 바위의 힘이 느껴져 기도처로는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고개를 돌리니 바위가 산 정상까지 길게 이어져 강한 기맥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만 놀라가면 능선으로 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상과는 적어도 9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고 태화산 정상과도 멀지 않은 곳이다. 생김이 마치 사람의 눈썹같고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혈은 아니라 해도 연소형(燕巢刑)의 형국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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