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내에서 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512번 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국립청주박물관을 지나고 우암어린이 회관과 청주동물원을 지난다. 그리고 상단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성고개로 접어드는데, 오르기 전 좌측으로 명암약수터가 있다. 명암약수터에는 작은 음식점들과 명암약수호텔이 있다. 약수터로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주차장에서 정면으로 가면 호텔이고 우측으로 보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고 둥근 바위에 연담공의 묘소가 있음을 알린다. 묘소 밑에 신도비는 고종 21년(1884)에 세운 것으로 높이 2.3m이며 1980년에는 그의 후손이 연담시비를 세웠다. 이곳에서 약 200미터의 거리에 연담공의 묘소가 있는데 입구에는 연담공의 시비도 있다. 게단으로 이어지고 있어 직선거리는 50미터에 불과하지만 산을 오르는 실거리는 200미터다. 부근에 상당재라고 불리는 곽예와 일족을 위한 제각이 있다고 들었으나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묘는 연담공(蓮潭公) 곽예의 묘소이다. 곽예(郭預,1232-1286)선생은 고려 후기의 명신으로 본관은 청주, 호는 연담이다. 곽예 (郭預 ; 1232~1286)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선갑(先甲)이다. 초명은 왕부(王府)이며 1255년(고종42)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었다. 1263년(원종4)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어 홍저(洪麵)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침범을 중지시킬 것과 잡혀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귀국한 후 예빈주부 겸 직한림원(禮賓主簿兼直翰林院)을 역임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자 판도정랑보문서대제 지제고(版圖正郞寶文署待制知制誥)로 임명되고, 이어서 국자사업 전법총랑위위 윤춘궁시강학사(國子司業典法摠郞衛尉尹春宮侍講學士)를 역임하였다. 1282년(충렬왕8)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한 뒤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문한학사(左承旨國子監大司成文翰學士)를 거쳐 1286년 지밀직사사 감찰대부(知密直司事監察大夫)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병들어 죽었다. 강직하고 소박한 섬품이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묘역 주위는 알미늄으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쳐져 있다. 묘역은 16m×16m, 봉분지름 3.9m, 봉분높이 1.5m로, 묘역 좌우에 높이 1.5m의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고, 상석 바로옆에 2기의 묘표가 있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으나, 국토개발지구로 지정되어 1975년 3월 현위치로 이전되었다. 기념물 제20호 연담공의 묘역은 전형적인 산진처에 자리하고 있다. 입수룡은 조금 길게 느껴져 설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만 살펴보면 좌우의 굴곡이 있어 사룡이 아님을 보여준다. 입수룡 상부에는 조상인지, 후손인지 알 수 없는 묘가 있는데 아쉽게도 바람을 맞는 묘역이다. 염담공의 묘는 언뜻 보아 기맥을 타고 있으며 좌향도 올바른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은 눈여겨 볼 것이 있다. 기맥은 정상적으로 지현자로 달려와 혈판을 이르고 좌측으로 뻗어나간다. 좌측은 물이 내려오는 계곡 방향이지만 새로 지은 건물의 측면으로 파고드는 바위가 바로 기맥의 끝단이다. 혈장에서 살펴보면 지금의 묘역에서 우측으로 두툼한 기맥이 드러난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나무들이 있으며 두단으로 쌓은 축대로 인해 자세히 들어나지 않지반 조심스럽게 나무를 살피고 찾아보면 기맥의 흐름이 여실히 드러난다. 현재의 묘는 비교적 잘 이장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혈심을 찾는데는 실패한 곳으로 보인다. 즉 산진처에 자리하고 있지만 심혈을 함에 있어 잉혈로서 지금의 혈장을 좌측으로 옮기고 향도 그에 따라 옮기는 것이 좋은 심혈이 될 것이다. 아주 뛰어난 혈은 아니지만 혈심은 이루어져 있으며 그다지 흉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교쇄가 너무 가까워 답답함을 벗어날 수 없으며 좌측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차가운 기운이 일어나고 바람이 회오리를 만든다. 단지 가깝기는 해도 교쇄가 이루어져 이같은 살기를 차단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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