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에는 단재 신채효의 묘와 영당이 자리하고 있다. 청주시에서 미원면에 이르는 512번 지방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명암약수처를 지나고 산성고개를 넘는다. 낭성면 소재지를 지나쳐 계속 가면 청원군 가덕면에서 이어지는 32번 도로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하나의 도로가 되어 미원면 소재지에 이른다. 그런데 이 두개의 도로가 만나는 곳 가까운 곳에서 고드미 마을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가 있고 입구에 단재 신채호 영당을 가리키는 간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2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들어가야 하는데 도로는 매우 좋고 단채 영당이 있는 고드미 마을에서 길은 끝난다. 길이 끝나는 곳 왼쪽을 바라보면 제법 높은 산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마을이다. 왼쪽에 넓은 주차장이 있고 ㅁ자 형으로 지어진 기념관 겸 역사관이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 영당이 있다. 설명에 의하면 이곳이 신채호가 살던 집이라고 하나 사실은 뒤쪽의 구릉 너머다. 단재영당(丹齋影堂)은 일제 때의 독립지사이며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영당으로 그의 묘소 바로 앞에 있다. 영당에는 영정이 그려져 봉안되었다. 영정은 1981년에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사당 앞에는 <정기문(正氣門)>이라 이름붙인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담장 뒤에는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는 선생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에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절함에 따라 선생이 어린시절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정에는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선생은 [황성신문]기자와 [대한매일신보]주필 등의 언론활동을 통해 민중계몽과 구국운동을 펼치다가 합법적인 애국운동이 불가능해진 1910년에 중국으로 옮겨 광복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했다, 1923년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불후의 명문으로 꼽히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은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빼앗아간 강도다. 따라서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은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는 등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는 한편,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28년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56세를 일기로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그런데 2006년 07월 05일에 찾아갔을 때 묘역의 봉분이 없었다. 담장 바로 뒤의 펑퍼짐하게 내려온 비야(非野)에 움푹 파고 모신 자리인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묘를 조성할 자리가 아니다. 앞쪽의 금형산을 안산으로 삼아 묘를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심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침 영당 옆의 단재문화관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묘역 뒤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묘역이 사라진 곳은 구터인데, 구터 뒤의 작은 구릉 모양 능선 너머에 새로이 이장되었다 하며 임시이장일 것이라 한다. 구터에서 불과 100미터 이내의 거리에 옮겨진 묘터를 보니 더욱 한심스럽다. 어찌도 무심하게 이장을 하였는가? 새로 이장한 무덤은 민초의 무덤보다도 작았고 주위는 화강암으로 만든 둘레석을 둘렀는데 길이가 겨우 1.5미터 정도다.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둘레석을 쓰면 물이 광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더구나 이곳은 애초에 신채호 선생이 살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주산이 가려주었다고는 하나 습기가 느껴지는 곳이고 주변은 풀이 어지럽다. 쑥대밭이라는 말이 괜시리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택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능한 빠르게 재 이장을 하여 민족을 위해 투신하신 선생의 체백을 편안하게 모실 필요가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구터에서 좋지 않은 기운을 받아 유골이 부골되었을지도 모른다. 구터가 물기가 있었으므로 어쩌면 육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물기에 젖어 있었을지 모른다. 차라리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을 하여 바다에 뿌렸다면 체백은 지금까지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혹시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린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이었든지 좋은 터를 찾아 이장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선생의 구터 오른쪽, 그러니까 좌청룡에 해당하는 곳에는 혈처가 있다. 물론 선생의 묘가 기맥조차 타고 있지 않으니 논할 것은 아니지만, 선생의 묘역 뒤로 이어지는 능선의 산진처에 묘역이 있다. 부근에 신씨들의 묘역이 적지 않은데 상석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신경권(申景權)의 묘역이다. 이 묘역은 기를 타고 있을 뿐 아니라, 혈이 결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혈은 반드시 크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의 묘도 지나치게 큰 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작은 터를 찾더라도 혈처에 모셔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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