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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두혈로 위장한 김석주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7-07 조회수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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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 산 75-1번지에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왕권을 흔들며 수많은 사화를 불러온 김석주(金錫胄)의 묘가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나, 남의 조상에 대해 잘잘못을 논할 것은 아니고, 그가 역사적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니 좋은 관산의 자료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이름을 얻은 사람의 묘역을 찾기 마련이다.
여러 곳에서 물어 결국 김석주의 후손이 산다는 집안을 찾아내었다. 주소만 가지고는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소로는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 산 75-1번지이다. 요즈음 대중화 된 GPS라는 장비를 장착하면 조금 찾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주소만 가지고는 물어물어 찾아야 한다.
광주시 퇴촌면은 제법 알려진 곳이다. 퇴촌면 소재지에서 직진하면 양평으로 가는 길로 88번 도로고 좌측 강을 따라 도요지와 붕어찜이 유명한 남종면으로 가는 길은 337번 도로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종면 사무소가 나오고 계속해 가면 귀여리 제청마을이다. 길가에 제청마을이라는 돌이 서 있다.
제청마을 안으로 들어서서 교회를 찾아간다. 마을 입구에서 100미터 정도를 가면 교회가 나오는데, 교회 왼쪽에 묘가 하나 보인다.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지형이 아니지만 문인석이 확연하게 보인다. 조선중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김석주(金錫胄)의 묘다. 김석주의 자는 사백(斯百)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김육(金堉)의 손자이고, 김좌명(金左明)의 아들이다.
남산(南山) 북록(北麓)인 회동(會洞), 현 회현동(會賢洞) 2가(街) 재산루(在山樓)에서 출생(出生)하였다. 그는 어릴 때 모습이 범과 비슷하였는데 범은 산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택호(宅號)를 재산루(在山樓)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그가 손수 심었다는 노송(老松)이 있었고 19절(折)폭포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우물이 있었으며, 우물 동쪽 석벽(石壁)에는 ‘창벽(蒼壁)’이라고 새겼다 한다. 그 후 종로구 관훈동에서 거주했다.
1662년(현종3) 과거에 급제, 전적(典籍), 이조좌랑을 지냈다.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南人) 허적(許積)과 합세하여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을 숙청하였다.
그 후 남인의 세력이 강화되자 서인들과 제휴하고 1680년 허적이 유악사건(油幄事件)으로 실각한 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우의정과 호위대장을 역임하고,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허새(許璽) 등 남인이 모역한다고 고변케 하였다. 후에 남인을 타도하는 획책이 너무 음험하였다고 하여 서인(西人)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샀는데, 이것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하였다가 후에 복구되었다. 숙종 묘정(肅宗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저서로는《식암집(息庵集)》《해동사부(海東辭賦)》가 있다.
입수에 서서 바라보니 금형산을 주산으로 삼아 좌청룡 우백호가 주밀하다. 청룡백호가 길게 뻗어나가 교쇄를 이루지 못했는데 언뜻 보아서는 산수동거(山水同居)의 모습이다. 이는 묘역이 자리한 지각이 주산에서 길게 뻗어온 모양 때문인데 이름하여 사두혈(蛇頭穴)과 유사하다.
지각 끝으로 물이 달려온 듯 밀려와 횡대수(橫帶水)를 형성하고 있어 사두혈의 조건을 이루었고 정면으로 물 가운데 작은 섬이 있어 누가 보아도 청와안(靑蛙案)으로 보인다. 백번 보아도 사두혈인데 혈심은 사두혈이 아니라고 한다. 어려가지 정황은 사두혈이나 완벽한 혈판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언뜻 보면 혈판이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이는 좌우가 인작(人作)으로 깎여 어느 정도의 굴곡과 높이가 있도록 보인 것이지 사실은 좌우가 마치 펼쳐진 듯 보이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아서는 입수룡도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좌우로 깎아서 이루어진 것으로, 애초에는 넓은 산맥지지(散脈之地)에 가까운 기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사두혈은 보룡(保龍)이 있어야 하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의 교회 터에 있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으나 역시 강한 기맥은 잡히지 않는다.
사두혈은 뱀의 머리 모양으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전순이 강하다. 그러나 김석주의 묘역 전순에 해당하는 터는 길게 뻗어나가 약하게나마 설기한 형상을 보이는데, 이는 이미 입수룡이 완벽하게 응기하여 결혈을 이루는 입수로 취기하지 못했고 산맥지지에 가까운 기맥으로 입수를 이루어 강하게 뭉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좌우의 평형도 맞지 않아 지나치게 퍼진 형상이며 완벽하게 혈장을 이룬 것도 아니다. 사두혈로 속아 소점하기에 좋은 곳이다.
묘역의 백호 방향에 연못이 있다. 후손이 판 것인지, 혹은 타인이 판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사시사철 붉은 황토흙의 물이 보이고 있다. 묘역 위쪽의 물이라는 사실도 좋지 않은데 물마져 흐리니 더욱 불길하다. 묘역 자체만으로는 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무해지지(無害之址)는 되었는데 연못이 나쁜 기운을 주고 있으니 빨리 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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