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자 의안대군의 묘 의안대군의 묘를 관산하기로 했다. 의안대군은 조선 태조의 제8왕자이다. 이름은 방석(芳碩). 본관은 전주(全州). 어머니는 신덕왕후(神德王后)다. 1392년(태조 1)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의 이복형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제 1 차왕자의 난으로 유배 도중, 이숙번(李叔蕃)에 의해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함께 살해되었다. 후일 의안군에 추봉되었으며, 세종 때 왕명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후사(後嗣)로 정해져 입묘봉사(立廟奉祀)하게 되었다. 또한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 등의 상언에 의하여 다시 대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소도(昭悼). 하남시에서 광주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왕복 4차선 넓은 도로에서 은고개 마루 정상을 막 넘으면, 우측으로 난 좁은 포장길가 버드나무집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 가게 된다. 이곳에 작은 간판이 달려 있다. 이 고개길에서 계곡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 더 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약 1키로 정도 더 올라간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은 곳에 다다르게 되면 갈림길이 있는 우측에 음식점 은고개집이 나타나는데 그 집 뒤로 나있는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산언덕으로 700m 가량 오른다. 산을 타고 오르는 길 양편에는 다락논들이 올망졸망 계단을 이루어 이채롭다. 전형적인 전원풍경인데 산길은 가파른 편은 아니나 겨울에는 추천하지 못할 길이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곳에 주차시키고 사람의 발자국이 뚜렷치 않은 왼쪽의 숲속 오솔길을 따라 200m 쯤 진입하자 하얀 집이 보인다. 집 뒤로 길이 있고 길을 오르면 이곳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 산152번지에 있는 비극의 주인공 의안대군 방석의 묘역이다. 하얀 집은 의안대군 방석의 20세 종손이 거처하며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묘지기들이 관리를 하여 왔는데 세상이 변하여 그들은 모두 떠나고 이제는 종손 자신이 묘와 묘역을 직접 관리한다고 한다. 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야하는데 흰 복실이들이 낯선 객이 왔다고 앙증스럽게 짖어댄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주인에게 연락을 하면 반갑게 맞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이곳에서 묵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집에서 묘역은 500여미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2004년 봄에 갔을 때는 비가 온 후여서 길이 좋지 않았었다. 의안대군 방석의 묘 탐방에 나섰다. 도랑물과 뒤범벅이 된 묘소에 이르는 길은 집 뒤의 나무숲에 있는데 오솔길이다. 제법 넓어 차라도 가겠지만 차가 다닌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또 한적한 곳에 차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길을 따라 걸은 지 5분정도 지나 작은 산등성이가 보이고 계단이 보인다. 계단 끝에 문화재임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있다. 그 간판뒤로 일국의 왕세자의 묘답지 않게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가리워져 있는 묘역이 있다. 일국의 왕자로서, 한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힘든 평범한 묘소였다. 묘소는 고려말과 조선초의 묘제식으로 정방형 석곽에 사각뿔 모양의 봉분이었다. 세자빈의 묘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치 아래에 조금 작게 같은 형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두 봉분 모두 잔디가 자라지 않아 붉은 황토 흙봉분 그대로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세찬 비에도 씻겨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하였다. 묘소 아래의 좌우에 각각 문인석 2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세자와 세자빈의 묘 앞에는 각각 둥근 머리를 한 화강암석 묘비를 세워두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풍화되어 글씨가 마모되고 이끼마저 두껍게 가려 해독이 불가능했다. 그럼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은 누구인가? 태조실록(太祖實錄)과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바탕으로 하여 살펴보면 조선 태조(太祖) 7년(1398년)에 피의 범벅이 된 난(亂)이 있었으니 방원(芳遠)의 난, 방석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는 많은 명칭을 지닌 사건이 있었다. 이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으로 벌어진 변란(變亂)의 이름들이다. 이 난은 정치적 견해로 보면 권세를 한 손에 장악한 정도전 일당을, 고려조 신하들을 중심으로 한 방원의 일당이 타도하고 권세를 빼앗아 장악한 사건이다. 제일차왕자의 난 (第一次王子-亂)이란 무엇인가? 1398년(태조 7)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방원(芳遠)의 난을 일컫는 말이다. 방원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한다. 태조에게는 왕비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방우(芳雨)·방과(芳果)·방의(芳毅)·방간(芳幹)·방원·방연(芳衍) 등 6남이 있었고, 계비(繼妃) 강씨(康氏)의 소생으로 방번(芳蕃)·방석(芳碩) 등 2남이 있었다. 태조는 강씨의 의견에 따라 7남인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배극렴(裵克廉)·조준(趙俊) 등이 방번이 세자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청하자 8남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정도전에게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겼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지위와 권세가 크게 상승하여 병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왕의 창업에 크게 공헌한 방원을 비롯하여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진법훈련(陣法訓鍊)의 강화로 세력 기반의 보루인 사병(私兵)마저 해체될 위기에 이르자 방원은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인다고 트집잡아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급습, 모두 살해한 뒤 방석을 폐위시키고 귀양길에서 살해하였다. 방석의 동복형(同腹兄)인 방번도 이 때 함께 살해하였다. 그 뒤 방원은 방과가 세자로 책봉되도록 하였으며,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한 제도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사병을국가의 군대로 귀속시켰다. 제일차왕자의 난 (第一次王子-亂)이란 무엇인가? 좁혀 생각하면 이복형제들간에 왕위 다툼으로 골육상잔(骨肉相殘)한 낯뜨거운 사건이다.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는 도중에 역시 칼로 베어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 방번(芳蕃)도 동시에 죽여버렸다. 이 변란으로 인해 방원(芳遠)을 세자로 받들게 되나 방원은 이를 사양하는체 하며 제2자 방과(芳果)에게 넘겨주게 된다. 방원은 무엇보다도 변란의 자신에 대한 혐의를 감추기 위한 의도로 삼기도 하고, 야심이 없는 방과에게서 세자자리가 자가에게 되돌려 올 것을 계산해 냈기 때문이다. 이에 태조는 총애하던 방석의 죽음에 상심하여 정사의 뜻을 잃고 9월에는 세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 정종(定宗 1399-1400)으로 등극하게 되며, 태조는 비로소 상왕으로 칭함을 받게 됐다. 가문의 [가승보]에 기록된 방석의 묘역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도공 사실(昭棹公 事實) 증(贈) 의안대군 오원(연안 별칭) 소도공 휘 방석(芳碩)은 실로 태조대왕의 8남이고 신덕왕후 강(康)씨가 낳았고 증 곡산 부원군 강윤성(康允成)의 외손이다. 그 돌아간 것은 태조 무인년(1398년) 북으로 거동하던 즈음이며 돌아갈 때 나이 12세이니 아마도 정묘(1387) 무진(1388) 사이에 탄생한 것 같으나 지금 가히 가공할 수 없다. 부인 부유 심(沈)씨는 고려조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니 전해 말하기를 정혼만 하고 성혼을 못한 채 부인이 먼저 돌아가셨다. 공이 돌아간 뒤에 수로로 연유해 행하는데 늘(시신)이 광주 우미에 도착하자 홀연히 회오리바람에 명정이 날려 지금 광주부 동문의 미라곡의 한 묘 옆에 떨어져 있으니 그 묘 곧 심씨(孝生)의 묘이다. 인해서 장사를 같은 기슭에 모셨다하니 아! 또한 이상하다. 처음에 공을 오원공으로 추증하고 시호는 소도라 했는데 금상(숙종대왕 6년) 경신년(1680년)에 재신 김수홍(金壽弘) 민정중(閔鼎重)이 근백(謹白)에 제사를 내리고 의안대군(宜安大君)에 추증했으며 심씨는 삼한국 대부인에 봉하고 순천부 부인에 추증했으며 조역(兆域)은 같고 혈(穴)은 달라서 공의 묘는 뒤에 있고 부인 묘는 앞에 있다. 처음에 세종대왕 제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로서 봉사케 했는데 금성대군이 피화(被禍)된 뒤에 우리 선조 세종대왕 제12자 밀성군(密城君) 침(深)의 2남 춘성군 당으로서 잇게 했으니 이 일은 ОО대왕때 일과 같다. 공의 묘소에는 유명 조선국 오원 소도공의 묘라고 쓰고 비 후면에는 황명정통(명나라 영종정통) 14년(서기1449년) 2월에 썼으며 부인 묘표에는 유명 조선국 대부인 심씨라고 썼고, 비 후면에는 황명정통 14년 정월에 세웠다고 썼으니 같은 해이나 달과 날이 다르다. 우리나라 역년(曆年)으로 상고한즉 정통14년은 곧 세종31년(1449년)이다. 비 세운 것은 50년 뒤에 있고 우리 선조 춘성군이 있지 않은 전이다. 의심컨데 조정으로부터 세웠는지 혹은 금성대군이 세웠는지 공이 돌아가신 날은 8월 27일이고 부인이 돌아간 날은 세대가 멀어 고증을 못하고 진실로 민멸(泯滅)해 없어졌다. 공묘 왼쪽 기슭에 옛묘가 있는데 그 표석을 상고해 보니 글자는 다 파여서 결함됐고, 다만 심공지묘(沈公之墓)란 四자만 있으니 심(孝生) 대제학(大提學) 묘 같으나 다른 분명한 증거가 없다. 경인년 가을에 일가사람 태희가 가서 성묘하고 인해서 개 사초하고 사실은 대략 위와 같이 기재한다."
묘역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유혈로 보인다. 같이 관산에 나선 회원들 모두가 유혈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사실 형태로 보면 전형적인 유혈이라 할 것이다. 이 경우 유혈이기는 하나 혈상에 2기의 묘를 쓸 자리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전형적인 유혈이라면 2기의 혈심이 나타나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쓰고 마음을 언정시켜도 혈심이 잡히지 않는 다. 다시 한번 형상을 둘러보기로 했다. 과연! 측유혈이다. 흔히 잉육혈이라고 부르는 혈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수기행, 혹은 풍수여행을 하다보면 가장 흔하게 만나는 괴혈이 바로 잉육혈이다. 전형적인 유혈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혈로 유혈의 변형된 형태인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용맥은 완연하나 당판이 조금 기울어진 듯하다. 옛말에 당판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또 금낭경에 이르기를 혈상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6가지를 말했으니 [태강순강포정]이라 한다. 이말 중에서 혈상이 고르게 균형이 잡혀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어쩐지 우선 방향이 길게 나간 듯하고 더욱 통통하다 좌선 방향을 살피니곧추선 편산이다. 늘 그렇지만 편산일 경우에는 반대쪽을 살피는 것이 관산의 방법중 하나다. 과연 우선 방향으로 두툼하게 살이 붙은 지각이 보인다. 전형적인 유혈이다. 방간의 묘가 있는 좌측으로 튀어나간 지각 방향으로 묘를 씀이 옳다 할 것이며 아래쪽 세자빈의 묘도 지금은 문화재의 간판 서 있는 지각 방향으로 향을 정해 묘를 씀이 옳다 할 것이다. 잉육혈! 유혈이되 유혈이 아닌 이 괴혈이 우리의 산하를 덮고 있다. 유혈인듯 착각하지만 정확하게 알기 위해 좌우의 균형을 맞추어 보면 편산의 형상을 지닌다. 묘역을 정비하며 편산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용맥의 균형이 맞지 않으며 편산은 오대불가장지중의 하나로 본다. 그러나 잉혈은 한쪽으로 치우친 형상을 지니기 때문에 능선상에서는 편산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혈장이 측면으로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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