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자료 제126호로 지정된 김영구 가옥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조선 고종 때 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1860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사대부의 살림집으로 마을 중앙의 약간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석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35년(헌종 1년)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52년(철종 3년)이조참판에 올랐다.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지방을 다스리면서, 1854년 고조부 하망(夏望)의 문집인 《서주집 西州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윤증에 대한 제문 속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말썽을 빚어 유생의 줄기찬 항의로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857년 석방되어 공조참판에 올랐으며, 그 뒤 186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가옥의 구성은 전체적으로ㅁ자 모양이지만 잘 살펴보면 ㄷ자 모양의 안채에 -자 모양의 사랑채가 결합됨 모양이다. 서쪽으로 작은 사랑채가 곁달리고 사랑방 앞으로 누마루가 시설되는 등 집앞에 일자로 늘어서 있었다는 행랑채가 헐렸는데도 일견 사대부 개인 취향의 우수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문은 큰 사랑채 서쪽 끝에 위치하여 안채로 돌아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랑채는 11칸 반규모의 민도리집인데 툇마루가 달린 사랑방과 대청, 작은 방들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고, 사랑방 앞에는 한 단 높은 누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안채는 24칸 규모의 민도리집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이 나란히 있는 본채 좌우에 날개채가 달려있는데 서쪽채에는 아랫방과 광, 마루가 있고 동쪽채에는 건넌방과 부엌, 광이 위치하고 있다. 본채 구조는 앞쪽에 퇴칸이 있는 오량가구이나 대청칸에서는 대들보가 통칸으로 걸쳐졌으며 날개채는 3량 구조다. 작은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마루가 있고 전면에 툇마루가 달려 있다. 뒷뜰은 각종 나무가 울창한 뒷 산과 연결되어 산의 아름다움을 집안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동쪽 둔덕의 소나무는 고색창연한 집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 집은 경기지역에 드문 폐쇄적인 공간구조, 잘 가공된 석재, 단면은 작으나 세련되게 다듬어진 목부재들, 시원하게 뻗어있는 추녀등으로 미루어 경장(京匠)이 건립한 건물로 추정된다. 김영구 가옥의 전체 모습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 넓이로 보아서는 사라진 부분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같은 손실로 보아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판단할 수 없다. 몇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바로 저택의 뒤를 둘러싼 산세일 것이다. 담은 아니지만 마치 담처럼 둘러쳐진 이 산세는 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와 다름없이 여전히 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보면 문을 들어서자 마자 앞을 가로막는 담과 같은 공간이 있다. 이는 전형적인 전착후관의 배치며 아울러 주인이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대비를 위한 배치다. 이 경우는 사대부들이 살았던 건축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