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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안산이 유두사인 자인사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7-13 조회수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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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바위 아래의 자인사
흔히 자인사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있는 전통사찰로 알고 있지만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에 속하는 지역에 자리한 사찰이다.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을 잇는 명성산(鳴聲山) 자락에 위치한다.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고 하여 이름 붙은 명성산은 산정호수와 어우러진 험준한 암벽, 억새밭이 절경을 이룬다.
명성산의 깎아지른 암벽을 배경으로 자인사가 서 있으며, 다소 왜소한 대웅전에 비해 큰 규모의 석불이 있다. 그 외에 관세음보살상과 여러 개의 석탑이 오밀조밀하게 서 있고, 경내에는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난다.
자인사 우측에 난 길로 접어들어 넓은 계곡을 따라가면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암릉에 올라서서 북동쪽으로 펼쳐지는 억새풀 가득한 평원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주변에 명성산, 산정호수, 등룡폭포, 삼부연폭포, 광덕산, 백운동폭포, 순담계곡, 임진강 , 화적연, 금수정지, 재인폭포, 국망봉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자인사를 찾아가려면 포천시 영북면이나 포천군 일동면, 혹은 이동면에서 찾아가야 한다. 모두 10여키로미터의 거리에 해당하여 찾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철원군 갈말읍에서는 339번 도로를 이용해 산안고개를 넘어 이르고 이동면에서는 78번 도로를 이용해 여우고개를 넘어야 한다. 일동에서는 339번 도로를 이용해 낭유고개를 넘어 가는데 어느 길이든 산정호수 안내간판이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산정호수가 먼저 나온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위치한 산정호수는 산속의 우물과 같은 맑은 호수라 해서 산정호수라 불리고 있다.1925년에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축조된 저수지인데, 1977년 3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경기북부의 대표 관광지다.
산정호수 주변은 명성산, 망우봉, 망봉산, 사향산을 비롯하여 여러 높은 산봉우리가 호수를 감싸듯이 드리우고 있으며 호수주변에는 깔끔하게 정비된 산책로가 있어 호숫가를 산책할 수 있다.
산정호수 옆에는 자인사(慈仁寺)가 자리하고 있다. 명성산(鳴聲山) 자인사는 태봉을 세운 궁예왕(?-918 )이 서기901년 송악(松岳:개성)에 도읍(都邑)을 정했다가 5년 후(서기905년)에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칭(稱)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한 후 그의 휘하 부장이었던 왕건(877-943)을 시켜 후백제를 공격했을 때, 왕건은 산자수명한 이곳에서 산제(山祭)를 지내고 꿈에 현몽을 받아 승전했고, 훗날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 밀리고 쫓겨 지금의 명성산성(약4-5Km전방에 산성이 현존함)에 진을 쳤을 때, 이곳 커다란 바위에다 제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올리던 ‘터’라 하여 ‘잿터’라고 불렀다. 뒷산을 명성산(鳴聲山) 이라 한 것도, 구만동 이라는 고을이름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재를 올리고 기원하던 ‘터’ 라하여 ‘잿터’ 요, 궁예왕의 군사나 식솔들의 울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하여 명성산이요, 하염없이 철원쪽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며 시름에 잠긴 궁예왕 에게 충신들이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그만하십시오” 했다 하여 그만이 구만으로 불려진 이름인 것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태조에 재위하자 이곳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니, 그의 시호를 따서 절 이름을 신성암(神聖庵)이라 명명하고 국태민안 을 기원해 왔으나 300여년이 지난 후 산불에 의해 소실되자 충열왕 3년(1227년)에 다시 재건하고 암자 이름을 왕건의 자호 를 본따 약천암(若天庵)이라 했다.
그 뒤 거란침입과 몽고침략, 6.25 사변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는 동안 남북의 길목이 전쟁터였던 관계로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로지 민가의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성터만 남아 있었다.
1964년 5월 김해공 스님께서 현지에 허물어진 축대와 옛 법당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주춧돌 몇개 나뒹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곳을 다듬고 석고로 된 18척의 미륵불 입상을 조성한 후 13평의 조그만 암자를 세우고 절이름을 자인사(慈仁寺)라고 명명 하였다. 그 의미는 미륵이란 말의 본뜻이 불가(佛家)에서 자비(慈悲)라는 말이고 궁예왕이 미륵세계를 구현코자함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 慈仁이란「仁」자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라 하여 영계(靈界)에서 나마 궁예왕과 태조 왕건의 “맺힌 악연(惡緣)을 풀고 미륵세계를 구현하소서” 라는 기원의 의미로 지어진 절 이름이었다. 1993년 정영도 스님이 국민관광지에 어울리도록 석고 미륵불이 서 계시던 곳에「극락보전」을 다시 짓고 미륵좌불(彌勒座佛)을 새로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황하게 설명을 하였지만 자인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자인사는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아무튼 산정호수라는 명승지와 함께 자인사는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얻고 있다.
자인사는 산정호수를 따라 돌다보면 만나게 되는데 입구의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약 200여미터를 가지 못하는 거리에 있다. 입구에는 수십기의 부도탑이 서 있는데 이는 납골묘로 사리와는 다르다.
계단을 오르면 포대화상이 앉아계신다. 포대화상이야말로 미륵의 현신이라고 하는데 이 도량이 미륵도량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법보다. 그 뒤로 주불전인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좌우로 범종각과 수각이 있고 좌측으로는 작은 당우와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곳곳에 이곳이 명당임을 알리는 성보와 기록이 새겨져있다. 명당이라는 이유는 주밀한 사격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실 자인사의 위치로 보아 주산이나 좌청룡과 우백호는 물론이고 호수 건너 안산까지 한결같이 위험을 주거나 주밀하여 절로 감탄이 느껴진다. 그러나 극락보전에 이르는 주룡은 이상하게도 약한 모습인데 이로 인해 이곳은 음택으로서는 가치가 없고 양택으로서 가치가 있으니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정면에서 보아 극락보전 뒤의 주산은 금형산일 뿐 아니라 강력한 기를 뿜어내는 듯 서기하고 좌측산은 문필봉이다. 측면으로 비스듬히 보면 주산과 문필봉이 천을태을(天乙太乙)처럼 보이기도 하여 주밀한 산세가 절로 가슴에 와 닫는다. 안산은 금형산에 유두 같은 둥근 귀사가 올라앉았으니 진정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기가 강한 곳으로 수련을 하거나 기도를 하기 위해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항시 그렇지만 모두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시멘트를 사용해서 전통사찰의 멋을 찾아내는데 실패한 것이 그 하나고, 백호에 해당하는 지각 너머로 흐르는 계곡의 물이 소리를 내서 울리는 것도 또 하나다. 시끄러운 소리는 사람에게 신경쇠약을 일으키는 것으로 참고삼을 수 있으나 수도를 하는 승인에게는 약이 될 수도 있다.
특이한 것은 단지 산의 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자인사에는 곳곳에 장승이 세워져 있다. 시시한 장승이 아니라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입이 딱 벌어지는 장승이다. 특히 눈에 뜨이는 장승은 극락보전의 4방위를 차지하고 있는 장승이다. 장승은 단순히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풍습과 문화, 풍수의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자인사가 무엇을 표방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특히 눈에 뜨이는 사격은 유두사다. 안산에 마치 여자의 젓꼭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면 이는 대단한 극귀사이다. 때로는 바위가 아니라 산으로 이루어진 모양이 여인의 젓꼭지 모양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가문의 번영과 후손의 번창을 의미한다. 자인사의 안산은 유듀사인데 참으로 귀한 사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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