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림사는 고찰이기는 하나 과거의 당우가 모두 소실되어 보존되지 않는다. 신라 제48대 경문왕(861~874) 때 자정국사(慈淨)가 창건하였다. 자정국사가 법력이 있다는 백성의 칭송이 있자 경문왕이 그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존호와 주석하는 절에 공림사의 사명을 지어 "공림사"라 쓴 현판 액자를 하사(下賜)하였다. 조선 제 2대 정종원년1399년에 함허당득통화상(涵虛堂得通和尙)이 명산대첩을 편력하다가 폐사가 된 공림사에 이르러서 법당과 요사채 등의 모든 건물을 새로 중창하고는 산세가 기고하고 웅위한 점이 있어 이곳에 주석했다. 조선 선조 25년(1593)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소실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갑자기 바람이 반대쪽에서 일어나 대웅전의 불길을 잡아주어 대웅전 하나만 남고 그 외 사찰 건물은 전부 소진되었다. 그후 조선 인조 때 다시 중창했으며, 1688년에 사적비를 세웠다. 공림사는 전쟁의 참화를 입은 사찰이다. 6.25사변 전에는 대웅전, 승방, 영하문, 문루, 행랑채, 방앗간 등 8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6.25사변 후 공림사에 공비가 출몰한다고 하여, 국군이 불을 질러 영하문과 사적비만 남고 사찰 건물이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그러던 중 1963년에 극락전과 요사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림사(空林寺)를 찾아가면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일주문 뒤로 보이는 바위산 이다. 마치 불암사 뒤의 불암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형적인 치마바위형태의 바위가 매끄럽게 보이고, 둥굴둥굴한 바위들이 전혀 날카롭지가 않다. 이곳이 낙영산이라 한다. 낙영산은 화양구곡의 남쪽인 청천면 사담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낙영산이란 뜻은 산의 그림자가 비추다, 혹은 그림자가 떨어지다 라는 뜻으로 신라 진평왕 때 당 고조가 세수를 하기 위하여 세숫물을 받아 들여다 보니 아름다운 산의 모습이 비친지라 이상하게 여겨 신하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이산을 찾도록 하였으나 나라 안에서는 찾지 못하였다. 어느날 동자승이 나타나 이산은 동방 신라국에 있다고 알려줘 신라에까지 사신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신라에서도 찾지 못해 걱정하던 중 한 도승이 나타나 이산의 위치를 알려주니 그 산을 찾아 산의 이름을 낙영산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공림사가 자리한 곳의 주소는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川面) 사담리(沙潭里)다. 공림사는 낙영산(落影山)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末寺)이다. 주차장에 이르면 우람한 나무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적지 않은 터가 아늑하여 당장에 집을 짓고 자리에 누워 평온하게 잠을 잘 것처럼 정겨운 이 사찰의 경내를 감싼 나무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이곳에는 수령이 1000년에 이르는 나무도 있다. 공림사(空林寺)에는 20여 그루의 고목군락이 희디 흰 바위산인 낙영산이 1000년 고찰과 어울리며 운치가 한결 깊어진다. 이렇듯이 느티나무 숲을 절 앞에 조성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풍수상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미루어 짐작하면 당우에서 좌측으로는 치마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기 위함일 수도 있고 나름대로 골이 깊어 계곡풍이 올라옴으로서 이를 막고자 하는 비보풍수의 한가지로 볼 수도 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공림사 사적비가 요사채 동쪽 언덕 아래에 있는데 비문이 완전하여 조선 중기의 사회상과 지역의 동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공림사 사적비의 앞면에는 공림사의 유래와 연력을 비롯해서 비의 건립경위 등을 적었는데, 강희 27년 3월에 썼으며, 나머지 3면에는 시주자ㆍ승려ㆍ주지ㆍ각수(刻手)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공림사의 인근에는 천연기념물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는 망개나무가 있는데, 망개나무는 갈매나무과에 속해 있는 낙엽교목으로 일본의 남쪽지방과 중국의 중부지방에서 서식하는 희귀식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속리산, 문경새재, 주왕산, 월악산과 내연산에서 자라던 것이 아직 몇 그루씩 남아있고, 사담리 덕가산과 남산 사이의 계곡에 400주 정도가 바위틈과 돌더미가 무너진 곳 등에서 자생하고 있다. 축대 앞에는 공림사에 대한 유래가 적혀 있다. 유래에 위하면 신라 경문왕 때 자정(慈淨)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정은 국사(國師)의 지위를 사양한 뒤 그곳에 초암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덕을 추모한 왕이 절을 세우고 공림사라는 사액(賜額)을내렸다고 한다. 1399년에 함허(涵虛)가 명산대천을 편력(遍歷)하다가 폐사가 된 이 절에 이르러서 법당과 요사(寮舍) 등의 모든 건물을 새로 중창(重創)하였다. 1593년에 왜병의 방화로 여러 건물이 불탔으나 대웅전만은 갑자기 바람이 반대쪽에서 불어와 보존될 수 있었다. 인조 때에 다시 중창, 1688년에 사적비를 세웠다. 6·25 뒤 공비의 잦은 출몰로 영하문(暎霞門)과 사적비만 남고 모두 소실되고 1966년에 법당과 요사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극락전과 영하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 요사 등이 있고, 극락전안에는 높이 80㎝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밖에도 범종과 부도 3기(基),맷돌·석조(石槽)·사적비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범종은 1776년에 주조되었고, 부도는 극락전 좌측의 청룡날에 2기가 있고 남쪽의 부도골에 1기가 있다. 석축을 오르면 대웅전 앞에 백색의 탑이 보인다. 물론 주차장에서도 보이는 이 탑은 근래 세운 것인데 웅장하고 아름답기 이를데 없다. 대웅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조성되어 있는 5층석탑이다. 좌우에는 동물상이 마주보며 탑을 수호하고 있다. 단층 기단에 연화문이 새겨진 갑석(甲石)을 올렸으며, 탑신(塔身)은 十자형으로 쌓고 옥신(屋身)에 부처님 설법장면을 새겼다. 또한, 그 위에는 다포식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屋蓋)를 올렸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있다. 전형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맥을 타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식으로 짜여져 있다. 전면에는 꽃문살로 수놓아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으며, 어칸의 기둥 머리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고 안에는 석가삼존상과 후불탱 3폭, 신중탱화 등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작은 종형 부도가 놓여져 있는데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으나 앙증스럽다. 그 너머 백호자락에는 풍수를 배우는 사람으로 꼭 보아야 할 산이 있다. 우측으로는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 건물로 어칸의 기둥 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달아 날카롭게 수호를 하고 있다. 건물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여져 있고 각 4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안에는 관음보살좌상과 목각탱을 모시고 있다. 그 좌측으로 가보면 부도 2기가 모셔져 있다. 공림사부도는 공림사 경내의 극락전(極樂殿) 좌측 청룡날에 2기가 있고, 공림사 앞 남산밑 부도골에 1기가 있다. 남산밑에 있는 부도는 석종형 부도다. 청룡날에 있는 2기의 부도는 모두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것으로 보여진다. 풍수를 배우는 사람의 눈은 그 부도가 자리한 위치를 찾는 데 쏠릴 것이다. 부도가 자리한 곳의 지세는 계곡 옆으로 좌우측의 기울기가 다른 편산이다. 예로부터 편산은 불가장지라 하여 묘를 쓰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편산일 경우 기맥을 살피면 유난히 배가 부른 부분이 있으니 이 경우 잉혈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잉혈은 임산부가 아이를 밴 형태의 지형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편유혈로 측유혈 이라고도 부르는 유혈성 괴혈에 속한다. 부도가 자리한 용맥도 이와 다르지 않아 계곡 방향으로 바위로 둘러쌓인 혈판을 이루고 있다. 물론 부도는 혈심에 정확하게 들지 못했으나 일반적인 형태로 보아 이상적인 자리로 보인다. 공림사는 풍수적으로 매우 잘 갖추어진 전형적인 명당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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