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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리 나만갑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7-17 조회수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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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나만갑선생(羅萬甲先生)의 묘와 신도비(神道碑)는 구리에 있다. 이 유적은 경기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으며 안정나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경기 구리시 사노동 산16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근교에 자리한 구리시는 서쪽으로는 아차산을 경계로 서울시 노원, 중랑, 광진구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왕숙천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마주보고 있고, 북쪽 역시 남양주시와 접해 있다.
남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그 너머에 서울시 강동구가 있고 양옆으로 서울시 송파구와 하남시가 있다. 1973년 7월 1일, 구리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에 그대로 편제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문화재가 많지 않은 구리에 몇 개의 문화재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나만갑의 신도비다. 이 신도비를 찾아 나섰다.
구리에서 퇴계원으로 향하는 국도는 조금 좁은 감이 있다. 그러나 나만갑의 신도비를 찾기는 제격이다. 구리에서 출발해 동구릉 앞을 지나 퇴계원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불과 3분을 지나지 않아 나만갑 신도비를 알리는 표지판과 만난다.
표지판을 따라 마을길을 따라 달리면 고속도로 앞에 자리한 나만갑 선생의 묘와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묘역 앞에 세워진 나만갑 선생의 신도비는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있으며 나만갑(羅萬甲:1592-1642)이 죽은 16년 후인 1658년(효종 9)에 건립되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관원의 묘가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이다. 신도비에 새기는 글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짓는 것으로, 나만갑신도비의 글은 김상헌이 지었다. 추기(追記)는 송준길이 쓰고 손자 양좌(良佐)가 지었다. 이외에도 김수항이 지은 지명(誌銘)과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나만갑 羅萬甲 [1592~1642] 의 본관은 안정(安定)이다. 자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이 일어나자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고, 그 해 통덕랑(通德郞)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때 노서(老西)인 김류(金찐)가 북인(北人)인 남이공(南以恭)을 등용하자 소서(少西)로서 이에 반대하여, 강동현감(江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는 왕을 모시고 강화(江華)로 갔다. 환도한 뒤 병조정랑 수찬(修撰) 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 형조참의로 시정(時政)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에 공조참의로 기용되고, 이어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전직되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12일부터 다음해 2월 8일까지 56일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당시의 생활상을 기록한 난중일기 《병자록(丙子錄)》를 남겨 당시의 모습을 후세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講和) 후 무고로 남해에 유배되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인조 17) 풀려났다. 그 후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영주(榮州)에서 은둔하며 살다가 죽었다. 저서에 《병자록(丙子錄)》 《구포집(鷗浦集)》이 있다.
나만갑 선생의 묘에 오르기전에 주변을 둘러보니 입수룡 방향에 고속도로가 보인다. 고속도로가 지나치며 용맥을 끊어놓았거나 심하게 상처를 입혔으니 장경에 이르는 단산에 속한다 하겠다. 당판을 찾기 전에 이같은 곳이라면 묘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당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경에 이르기를 천리내룡을 살피기 이전에 당판 위 3절을 살피라 했다. 묘역이 있는 위쪽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기맥을 상한 용맥이 마치 누룹적처럼 좌우로 펴져 내려오고 있어 마치 치맛자락처럼 느껴진다. 기맥을 살피기 이전에 이같은 자리는 이미 힘이 없는 용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 어렵지 않다.
당판을 살피니 좌선 방향이 급하고 우선 방향이 완만하다. 경에 이른 불가장지중 하나인 편산이다.편산에서는 기운 쪽을 살펴 측유혈이 있는가 살피라 했는데 기맥은 고사하고 지각도 없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혈판이 조성될 수 없는 지형이니 애석하기만 하다. 이미 혈판이 이루어지지 않아 혈로서의 가치를 잃었으니 주위를 살펴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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