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이름이 붙는 유래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지세 즉, 생긴 모양 또는 방향에 따라 지어진 것이 있고, 그 고장에 특징적으로 많이 나는 식물, 동물 또는 특산물에 따라 지어진 것이 있다. 또한 그 지역에 많이 사는 성씨에 따라 지어진 것도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지명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한 지명에는 땅의 이름은 물론이고 바다의 이름, 내(川)의 이름들까지 포함되어 지표상의 모든 이름이 그 대상이 된다. 지명은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및 어원학 등의 학문에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고유지명은 대체로 신라의 삼국통일 후 한자화되었다. 그런데 지명의 유래를 살피는 데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지명에는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화하면서 고유지명의 근원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에 맞게 다시 만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새말이라는 고유지명이 있을 때 그 유래를 따지지 않고 이를 한자화할 경우 새롭다는 의미의 신(新)자를 넣어 신촌, 또 쇠라는 의미의 금(金)을 넣어 금촌, 또 사이라는 의미의 간(間)자를 넣어 간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와 지리적인 형세가 반영되어 있는 이러한 고유지명의 유래가 일제에게는 소중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의대로 한자화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의 주변에서 일고 있는 고유지명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구리라는 명칭은 1914년 3월 1일 부, 군, 면 폐합 때 부령(府令) 제111호로 당시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그리고 노해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자와 망우리면의 리자를 합하여 구리면(九里面)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현 구리 지역의 옛 명칭인 구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 구리시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九旨)였다. 그 구지(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1530년 조선 중기인데 그 이전의 책에서는 구지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 한편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는 구지(九旨)라 표기되어 있다. 즉 구지의 한자 표기는 구지(龜旨)가 일반적이었지만 구지(九旨)라는 표기도 아울러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구지의 어원을 살펴보면 육지가 강이나 바다로 돌출한 지역을 곶이라 하는데 구리지역은 한강과 왕산내로 둘러싸인 곶으로 볼 수 있다. 곶이 고지로, 고지가 구지로 변하여 이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자로 구지(龜旨), 구지(九旨)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에서 구리로 오다 보면 한다리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는 한교( 韓橋), 규장각에 있는 고문서에는 일교(一橋), 1912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백교(白橋)라 표기되어 있다. 1956년에 발간된 [경녕군파 선원이씨세보]에 있는 지도에는 대교(大橋)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을 한자말인 한(漢), 대(大) 일(一)자 등으로 대신 쓴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곳의 원 지명은 한다리인데 일제시대에 흰다리라고 하여 이것이 다시 백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한다리가 옳은 지명이라고 한다. 아 마을 뒷산 아차산 골짜기에 효빈김씨의 묘가 있다. 워커힐 호텔 방향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오다보면 한다리라는 마을을 만난다. 아차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마을이다. 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백교 저수지가 나온다. 백교저수지 좌측산으로 보이는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법 넓다. 호수를 지나 약 5분 정도 들어가면 삼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가면 관룡탑이 나오고 직진에 가까운 정면 길로 계속 가면 약 10분 이내에 효빈 김씨의 묘역을 만난다. 효빈김씨(孝嬪金氏)는 태종의 빈으로 제1서자인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다. 그러나 효빈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그녀의 부친은 김 점(金 漸)이고 외조부는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권씨가문의 권 유다. 구리에 묘가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그의 묘는 한다리 마을에 있는 것으로 만 알려져 있었다. 효빈김씨의 묘역 아래에는 오성군(梧城君)의 묘역이 있다. 오성군은 효빈김씨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효빈김씨의 묘를 보면 우선 당판의 모양이 부정확하다. 아울러 입수룡이 찢어지고 퍼진 모양이며 살이 부정확하다. 전형적인 노년기 산의 형태인데 아차산이 강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은 기맥을 타고 좌향이 좋아 명혈이라 한다. 간혹 패철만을 빌어 명당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부덕의 소치며 기맥의 흐름을 무시하는 처사다. 자세히 보면 인작이 가해져 그럭저럭 묘역이 혈판처럼 보이기는 하나 이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두개의 기맥이 갈라지는 계곡의 영향을 받는 곳에 해당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묘역 앞으로 흐르는 가는 물줄기가 있어 졸졸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산책을 나서 물놀이를 하기에는 그만일 것 같으나 묘역에서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자고로 후손에 벙어리가 날 것이니 극히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관산을 마치고 내려오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약 500미터를 올라가다 보면 작은 샛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작은 도랑물을 건너 100여미터를 오르면 돌을 이용해 쌓은 관룡탑이 나타난다. 관룡탑 옆에 허름하게 지은 토굴같은 집에 할머니 한분이 사시는데 이분이 40년동안 쌓은 탑이라 한다. 절로 머리가 숙연해진다. 찾아가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할머니가 커피를 준다. 찾아가는 길에 과일이라도 들고가 드리면 좋을 것이다. 이미 연로하신 분이라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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