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시는 약 80%가 그린벨트로 형성되어 있고 환경유해업소가 거의 없는 쾌적한 도시다. 산지와 한강과 합류하는 왕숙천의 최하류 하곡(河哭)에 펼쳐진 구릉지와 충적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의 산지는 북부로부터 수락산. 불암산, 검암산, 아차산으로 이어져 있다. 동북쪽의 왕숙천 너머에는 수리봉. 천견산, 퇴뫼산. 철마산. 천마산등이 남북으로 연이어 있고. 서쪽 아차산 지대와 동쪽 왕숙천 일대의 평지로 인해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세가 나타나며, 경기도의 중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는 명산 아차산이 있고 아차산 기슭에는 명빈묘가 있다. 명빈묘는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의 경계지역에 놓여있다. 아차산 기슭인 이곳은 엘지그룹의 축구장과도 가까운 곳이다. 구리에서 가자면 워커힐 방향으로 달리다가 워커힐 좀 못 미쳐서 길가에 세워진 명빈묘(明嬪墓)라는 표지판을 보면서 우회전하여 산기슭으로 올라가면 된다. 계곡 속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산언덕을 조금 올라간 곳에 철책이 둘려있고, 그 안 숲 속의 곡장(曲墻)도 없는 무덤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왕비에 버금가는 빈(嬪)의 묘라기에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게다가 평소 출입조차 제한하여 사시사철 문을 걸어 두고 있다. 어찌어찌l해서 들어가 보면 겨우 1m도 안 되는 사각 빗돌에 그저 “명빈김씨지묘” 라고 만 쓰여 있어서 그것만으로는 어느 왕의 빈이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고, 문화재관리국에서 세운 표지판을 보고서야 겨우 태종의 빈이었음을 알았을 뿐, 그 이상의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그렇다면 명빈은 누구인가? 1991년 10월25일 사적으로 지정된 명빈묘는 조선조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明嬪) 김씨의 묘다. 명빈(?-1479)은 지돈령부사(知敦寧付事)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태종 11년(1411) 11월 명빈으로 책봉(冊封) 되었고 성종 10년(1479) 6월5일 사망하기까지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켰으나 태종과의 후사는 없다. 아천동 동사골 구릉(丘陵)에 2천5백 여평의 규모로 조영되었으며 묘역의 석물(石物)은 표석 1기, 문인석 1쌍, 상석(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다. 몇 번인가 들여다본 묘지만 풀이 무성하다. 한때는 영화의 극치를 누렸을 텐데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문헌을 뒤져 봤지만 태종의 승은(承恩)을 입은 후궁은 부지기수여서 명빈을 찾기가 어렵다. 태종의 빈만도 여덟 명이나 되었다는데 신빈신씨, 선빈안씨, 의빈권씨 등의 이름이 나오지만 명빈김씨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기는 하지만 태종의 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명빈의 묘역을 더듬어 보니 불이 날까 두려웠는지, 혹은 장마가 다가오니 물길을 돌리려 했는지 묘역 뒤를 깊게 파놓아 보기가 영 흉측하기 그지없다. 다시 살펴보니 입수룡이 넓게 퍼져 그다지 강한 용맥은 아닌 듯 하다. 당판을 살피니 좌선 방향으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묘봉이 서 있는 곳에서도 그다지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 내려와 살펴보니 우선 방향 전순 하단에 작은 기맥이 돌출되어 다시 하나의 작은 당판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어째 가평 현등사의 지진탑이 자리잡은 모양을 연상케 한다. 다시 살펴보니 우선 방향이 부른 것은 우선으로 기맥이 돈 것이 아니라 우선 방향으로 작은 기맥이 뻗어나간 탓이다. 이 경우 이 기맥이 잉육혈인지 귀성인지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만약 잉혈이라면 현제의 명빈묘는 우측 아래로 내려써야 하고 향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성이거나 지각이라면 현재의 자리가 옳고 귀성에 다시 하나의 당판이 형성될수 있음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본 결과 귀성과는 거리가 멀고 우선도 아니다. 결국 이 당판은 잉육혈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좌측 전순 아래 작은 기맥이 뻗어 나와 지각을 이루고 그 지각에도 크기는 작아도 묘를 쓸 수 있는 당판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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