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리 입석은 마을 입구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2006년 7월 18일, 영주 부석사에서 총무의 소임을 맡고 계시는 범종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중앙고속도로 풍시 나들목에서 나온 다음 순흥과 부석을 거쳐 물야로 이어지는 931번 도로를 내달렸다. 순흥하면 순흥안씨들이 생각나는 곳이다. 순흥면 사무소가 있는 마을을 지나 단산면으로 향한다. 소수서원 앞을 지나 선비촌을 알리는 커다란 돌표지를 지난지 약 1킬로 지나면 좌측으로 마을길이 있고 입구에 청구2리라는 마을 표식이 붙어있다. 이 길로 들어서서 400여미터를 간 다음 첫 번째 삼거리에서 바라보면 우측 길옆의 논 옆에 보호되는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보이는데 그 속에 입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예전부터 여근동(女根洞)이라 불려온 동네라고 한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여근동 입구에 보호수와 함께 일명 남근석 또는 선돌이라 불리우는 돌기둥 2기가 있다. 삼거리에는 직진하면 널근리, 즉 여근동이라는 돌표지가 있어 마음을 흔든다. 여근동이란 형태일 수도 있지만 음기가 강한 마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킬로 정도를 들어가면 여근동이라는데 약속시간이 바쁘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입석만 살펴보기로 했다. 이 입석은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다. 입석은 지석묘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지만 그 분포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주로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극히 일부만을 다듬어 세운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원래부터 있던 거석을 입석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청구리 입석은 5m간격을 두고 2기가 서 있다. 동쪽의 것은 높이 210cm, 둘레 225cm이고 서쪽은 높이 170cm, 둘레 172cm 크기의 화강암 자연석으로 제작되었다. 두기의 입석은 동서방향으로 약 4m 떨어져 있다 입석은 사람크기 정도며 주변에는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숲 내지는 당산나무로 보이는 소나무들로 둘러쌓여 있다. 이 소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선돌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겉표면은 힘차고 투박한 감촉으로 당당한 남성미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동쪽의 큰 입석 가까이에는 성혈(性穴)이 새겨진 화강암의 방형(方形) 지석묘 1기가 있다. 성혈유적은 거의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암각화의 일종으로, 주로 다산(多産)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제작된 선사시대인의 신앙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그리고 지석묘 위에 성혈을 새긴 경우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 역시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만들어진 시기는 청동기 시대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전일 수도 있다. 특히 남근석 2기가 나란히 동시에 있는 경우는 드물며 이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상당하다. 영주 풍기 선돌과 같은 형태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와 유사한 사상을 가진 형태로는 장승이나 솟대 등의 상징물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2기가 가지런히 잘 보존된 경우는 별로 없고 만들어 졌더라도 최근에 조성되어진 것들이 많다 1970년대 초까지는 이들 2기의 입석 뒷편에 당(堂)집이 있어, 이곳에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동제(洞祭)를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입석이 한쌍으로 서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며, 특히 지석묘가 동쪽 입석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동신(洞神)을 모시는 당집이 있어 이 일대의 성소(聖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자식을 비는 흔적이 있고 마을 주민들의 신앙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우리의 민속 문화는 양반이나 왕족 등의 한정된 특수 계층의 문화와는 달리 서민이나 평민 계층에서 오랜 시간동안 걸쳐 내려온 문화 현상이다. 선돌은 지극히 토속적이며 신앙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여기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구전된 신화나 전설 등과 함께 각 마을에 이어져 신성함을 상징하게 된다. 선돌은 토속적인 싱앙의 형태며 아울러 풍수가 저변에 확대된 이후에는 풍수적인 요소와도 일치하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입석의 경우에는 지역의 음기를 다스리거나 길 안내를 하는 용도 외에도 마을 입구에 세워 잡스러운 질병을 차단하는 용도로 사용하여 비보풍수의 일맥을 잇고 있다. 청구리 입석은 이 마을이 여근동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 역할이 능히 짐작되는데, 옛 사람들은 이 마을이 음기가 강해 문제가 있을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남근의 형상을 지니는 입석을 세워 음기를 누르고 충족시키려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남근석 주위는 나무를 심어 성기 주변의 형상을 충족시킴은 물론이고 길쭉한 계곡 마을의 입구를 가리는 풍치림, 혹은 방품림의 계념으로 삼아 비보풍수를 실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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