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약재는 길옆에 있다고 들었는데 찾아보니 찾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먼저 두학초등학교를 찾아갔는데, 두학동과 흑석동의 경계지역에 있는 이 학교는 환포하듯 둘러싸고 있는 도로 옆에 있다. 두학초등학교 앞은 교차로가 이루어져 조금 난해하지만, 이곳에서 어상천으로 가는 길을 찾으면 된다. 자작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장치미 못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며 바라보면 중말 입구를 지나고 곧 길가의 큰 마을이 나타나는데 상풍교 앞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좌측으로 새로 조성한 신도비가 있고 작은 간판에 박약재라 쓰여 있다. 산길로 약 100미터를 걸어가면 시도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된 박약재(博約齋)가 나타난다. 박약재는 진주 강씨 문중이 자녀교육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조선 중기에 세운 것으로 효종 정묘호란 때 척화를 상소한 상곡 강유가 공부하던 곳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조성하고 왼쪽에 방 2개, 오른쪽에 방 1개를 배치하였다. 현판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유학자며 의병장인 유인석이 쓴 것이다. 호서의병장 운강 이강년의 전투사인 운강창의일록을 강순회, 박정수, 이화장 등이 이 서재에서 편찬하였다. 진주강씨 문중에서 설립하여 후인들의 교육에 이용하였다고 하지만 더욱 큰 의의는 이곳이 독립운동에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풍수적으로는 어떨까? 언뜻 보면 많은 것이 가꾸어져 있다. 우선 집 앞으로 물이 흐르고 뒤가 산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가 이루어진 전형적인 양택지라 볼 수 있다. 그러고 음택과 마찬가지로 양택도 명당의 개념이 중요하다. 즉 현재의 박약재가 자리한 곳이 중요한 것이다. 박약재가 자리한 곳은 땅이 기울어진 사면을 다듬은 곳이며 뒤로 산이 장막처럼 둘렀다고는 하나 좌우측의 산자락 사이에 자리한 계곡에 속한다. 그리고 계곡의 특징대로 바닥에는 습기가 넘친다. 박약재 앞의 작은 연못이 증명하고 있다. 박약재의 목재를 검게 칠했는데 아마도 습기를 방지할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장풍이 뛰어나고 교쇄가 이루어졌다 해도 습기가 많아 한여름에 끈적거리고 계곡으로 인해 바람이 스미는 곳이라면 양택지로 어울리는 곳은 아니다. 다만 박약재는 사람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므로 그나마 괜찮을 것이나 장기 거주는 어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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