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었기에 효창원(園)이라고 하였다. 이후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오늘날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3의사(義士)의 묘가 있다. 3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에 일본에서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공원 정문 오른쪽 언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 3위의 묘가 있다. 언덕 위쪽으로는 어린이놀이터가 있고, 원효대사(元曉大師)의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아래쪽에 있는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에 문을 연 이래 축구, 육상, 정구 등의 스포츠 경기가 자주 열려 왔고, 그 밖에 시민의 집회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는 백범과 그의 동지들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7명이 묻혀 있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있다. 백범이 개인 자격으로써 환국하는 수모를 당한 뒤 이국 타향에서 숨진 동지들의 유택 터로 선택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효창공원 정문인 창렬문을 들어서면, 시퍼런 빛깔의 커다란 기둥 조형물이 인공연못에 기우뚱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무덤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징물이다. 더구나 연못의 물도 늘 푸르지는 못하니 묘하의 연못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묘하의 물이 푸르지 못하면 후손에게 눈병이 나고 장기 계통의 병이 생길까 두렵다. 효창공원은 매우 엄숙해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엄숙보다 유흥이 어울리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거짓으로 국민을 위한다는 자들의 작태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효창공원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지은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경로송덕비, 원효대사 동상 등의 매우 이질적인 기념물들이 서 있다. 또 원칙적으로 사적지에 지을 수 없는 대한노인회관, 서울시노인회관, 배트민턴장, 어린이놀이터 등의 시설도 있다.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 벌어진 곳인데 이곳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이 묻힌 곳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공원을 이 지경으로 만든 위정자들 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자이다. 효창공원에서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 중에서 압권은 효창운동장이다. 효창운동장은 1959년 숨진 백범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이나 그리움을 질시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지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범 묘소를 찾는 사람들이 못마땅해 검문까지 하도록 했고, 심지어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 예비역 장군도 검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 나라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친일과, 김구의 저격에 이르기까지 먹칠을 했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 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한사람으로 오해, 혹은 질시받는 인물의 모습을 바로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장인 김신장군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내게 아버지와 동지들의 무덤을 시내에서 서울 밖으로 옮기라고 요청했으나, 거절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 얼마 뒤 축구장이 효창공원에 지어지기 시작했다”고도 말했다. 얼마나 어이없고 눈물 나는 일인가? 그러한 정신으로 한국을 통치한 초대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안타깝다. 이승만은 묘소앞에 운동장은 안 된다며 불도저를 가로막고 선 심산 김창숙 선생을 밀친 뒤 15만여 그루의 큰 나무를 베고 연못까지 메워 그곳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누구라도 하품을 할 일이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와 그의 추종세력이 자신의 어이없는 정치를 가로막을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또한 김구가 죽은 다음에도 그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질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운동장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4·19혁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다른 정치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도 이곳의 무덤을 서오능으로 옮기고 골프연습장을 지으려다 유족과 각계의 반대로 실패한 일이 있다. 일본군 장교 출신 박 대통령은 이에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이 곳에 앞서 말한 갖가지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설들을 잇따라 세웠다. 그래서 현재 5만4천여평 가운데 2만2천여평에는 엉뚱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효창공원이 그나마 대접을 받은 것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실세였던 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 시절의 일이다. 1987년 `효창원 성역화계획단은 이질적인 시설을 모두 제거하고 이 곳을 성역화해야 한다는 방안을 내놓았으며, 1989년에는 사적 33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곳을 성역화하는 어떤 실질적인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에 백범기념관이 테니스장 터에 들어섰다. 효창공원을 공원이 아닌 선열의 묘역으로 볼때, 이 지역의 산세와 묘역의 배치를 고려하여 크게 4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음택지로 설명해보면 가장 먼저 살필 곳이 김구선생의 묘역이다. 바로 효창공원이 있게 한 사람이며 이곳이 선열의 묘역이도록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구의 묘역은 우측의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2006년 현재 백호 부근에 백범기념관이 있다. 효창공원을 둘러싼 산자락은 마치 삼태기 모양인데, 삼태기의 안쪽으로 각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김구 선생의 묘소다. 언덕에 마련되어 있는 계단 위로는 나무들이 아치를 이루고 있어 묘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는 마치 항일 운동과 민족 자존 독립의 거목이었던 김구 선생에 대한 예를 갖추라는 묵시적인 징표인 듯 하다. 계단을 오르면 김구 선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여러 순국 열사들의 시신을 이곳에 안치하여 효창 공원을 묘원으로 조성한 김구 선생 자신도 1949년 6월에 총에 맞아 죽자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김구의 묘역은 뒤쪽에서 기맥이 들어오고 있으나 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넓게 퍼져 있다. 아울러 기가 뭉친 곳이 아니라 퍼진 곳이다. 좌청룡이 가까우나 수구는 허한 편이다. 가장 중요한 혈판은 어떤가? 인공으로 조성한 사성의 입수에서 살펴보면 봉분의 정상과 뒤쪽은 바래기라는 풀이 자라고 있다. 이 풀은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풀로 이곳에 건수가 많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울러 사성의 오른쪽 끝에도 물풀이 자라고 있는데 샘이 있었던 곳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청룡 너머는 남산이며 백호 너머 아주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정면으로는 용산 숲이 보이고 주변으로는 빌딩들이 들어서 사격을 가리고 있으므로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묘역이 결코 좋은 곳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수가 적지 않으니 이는 결국 잔디를 죽이고 풀을 키우며 지나치게 푸르름이 우거지게 한다. 풀지 지나치게 많고 푸르면 수기(水氣)를 의심해야 한다. 두 번째 공간은 북한반공투사 위령탑이 있는 공간이다. 기가 가장 강한 공간이고 가장 높은 구조물이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공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구별하면 어린이 놀이터는 빨리 없어져야 하겠다. 안타까운 것은 엄숙해야 하는 공간에 어린이 놀이터를 지은 자들의 작태다. 사상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공간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어린이 놀이터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안타까운 것은 위령탑에서 살펴보면 의열사가 있는 방향으로 하나의 지각이 보인다. 지나치게 짧아 지각치고는 마치 비온 후에 머리를 내민 대나무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전형적인 잉혈이다. 지금은 산책길로 이용되고 있는데 살펴보면 전순에 바위가 박혀 있다. 뛰어난 음택지지만 버려진 땅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세 번째 공간은 3의사의 묘이다.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세 명을 가리켜 3의사(義士)라 한다. 김구 선생이 3인의 순국 열사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옮겨 옛날 문효 세자가 묻혀 있던 지금의 자리에 1946년에 안치하였다. 3인의 유해가 고국 땅으로 오던 날 김구 선생은 유해를 붙잡고 오열을 터트렸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시신이 없이 만들어진 것으로 3 의사의 무덤을 만들 당시 함께 마련된 것이다. 당시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문효 세자의 장난감으로 추정되는 물건과 그 밖의 여러 물건들이 돌로 만든 함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과연 훌륭한 무덤의 터인가?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다. 지나치게 판 것인지, 혹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3의사 묘터는 기맥만을 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 공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의 묘역이다. 이 묘역은 김구선생의 묘와 3의사의 묘가 수구를 바라보는 형상으로 기맥을 타고 있는 것과 비교해 마치 배반하듯 청룡날의 바깥을 보고 자리잡았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의 묘가 나타난다. 임시 정부의 초대 주석인 이동령(李東寧)과 비서 부장 차이석(車利錫), 군무 부장을 담당했던 조성환(曺成煥)의 유해가 광복 직후인 1948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풍수적으로는 어떤가! 언뜻 보아서는 청룡날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으니 절맥사로 보일 수도 있으나 입수위에서 가지가 갈라지듯 지각이 뻗어 나와 작은 당판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파내고 넓힌 모습이라 제모습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현재로는 가장 좋은 터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열사들의 묘를 좌우로 벌려놓은 형상이다. 3의사 묘도 그와 같고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의 묘역도 다르지 않다. 기는 좌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흐른다. 간혹 지나친 생각으로 계급을 따져 이렇게 묘역을 조성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각의 묘역을 재정비 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김구 선생의 묘역은 수맥이 의심되는 곳이므로 이장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동일공간 내의 북한반공투사 위령탑이 있는 공간의 잉혈이 좋겠고 3의사는 조금 더 위쪽으로 올려 유혈의 혈상에 자리함이 옳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정요인의 묘는 굳이 좌우가 아닌 수직성을 부여하여 기맥을 따라 묘역을 조성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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