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사는 그리 큰 사찰이 아니어서 볼 것이 많지는 않지만 대웅전(大悲寺 大雄殿)은 보물 제834호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794번지에 자리한 대비사의 대웅전은 반드시 보아야 할 당우중 하나다. 운문산 서쪽에 위치한 대비사는 557년(新羅 眞興王18년)에 신승이 호거산(虎踞山)에 들어와 3년 후인 560년(신라 진흥왕 21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걸려 5갑사를 대작갑사(현 雲門寺)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웠는데,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또는 대비갑사(大悲岬寺)라고 한 다섯갑사 중의 하나로 신라 진평왕 22년(600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중창한 사찰이다. 이 대웅전은 16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춘 건물로 전체구성은 짜임세가 있고 공포도 건실하게 짜여있다. 불단내부에 조선 숙종11년(1685)에 대웅전의 불탁을 수장하고 이듬해 법당을 단청하였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이 기록을 근거로 이 건물의 중건 년도를 숙종(1674년∼1720년)년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후불정(後佛幀)은 1695년(康熙34년)에 제작된 것으로 건축시기는 불정 보다 앞서 건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깔고 상부에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고 그 위에 다포(多包)를 구성하고 기둥사이에 각각2개의 공간포 간격이 정연하며 천장은 우물 천장이다. 정면3칸, 측면3칸의 규모로 전면의 길이가 34측(10.2m) 측면의 길이가 24측(8.6m)인 전형적인 다포계 맞배지붕이고 공포는 내3출, 외2출목으로 조선중기 다포계 맞배집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둥은 모두 민 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상승감을 위하여 모서리 기둥을 조금 높이는 귀 솟음 기법과 안정감을 위한 안 쏠림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여러번 중수되었으나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다. 단청(丹靑)이 퇴색하여 백골이 드러나있으나 사찰건축 연구에 중요한 전각이다. 이 사찰은 당초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사원의 명칭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붙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찰 입구의 많은 부도가 고승 대덕 분들이 주석(主席)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비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살필수가 있다. 물론 사찰은 종교적인 관점이 가장 크다. 물론 혹자는 염승불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불교가 민생에 파고들어 풍수적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비사의 위치가 계곡 깊숙한 곳이므로 장마철에 물이 불어 마을에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원력을 요구한 비보풍수로 살필수도 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주산의 우락부락한 산세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의 모양이 마치 사자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소리라도 지를 듯 하니, 강한 기맥이 대비사에서 수도하는 승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는 새삼 살필 것도 아니며, 삼성각 뒤의 문필봉은 이곳에서 수도를 한 많은 승려들이 도법을 깨우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은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정면의 안산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 국이 작은 듯 보이고 그 산에 치마바위 형상의 바위가 있어 음란한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절 앞의 나무로 보아 과거에는 비보풍수를 한 것으로 파악되나 지금은 많이 베어진 것인지 수구가 열려있으니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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