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암을 찾기 위해서는 운문사 숲길을 지나야 한다. 운문사 진입로에 있는 솔밭 길은 어느 산사의 진입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아름답다. 매표소를 지나면 솔향이 물씬한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짧게는 100년 안팎부터 길게는 수령 200~300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다. 예로부터 대가람 주위에는 나무들이 보호되었으니, 사찰은 예로부터 숲을 지키는 숲지기의 역할을 병행했던 것이다. 스님의 소임중에는 나무를 지키는 소임도 있다. 솔숲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백 년의 나이를 먹은 노송의 밑동에 하나 같이 생채기가 또렷이 남아 있다. 일제 치하 전쟁 물자로 쓰던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칼집을 냈던 상흔이라고 한다. 어느덧 사리암 주차장이 나온다.주차장 끝에 사리암 표식이 있다.10분을 달려가자 도로는 끝이나고 계단이 나타난다.두 사람쯤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벼랑길 양쪽엔 돌담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오랜 세월 땀으로 쌓여진 돌길은 좌우로 갈짓자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보아 기울기가 심하다. 가파른 경사에 울퉁불퉁한 길로 순탄하진 않지만 길들이 예쁘게 정돈되어 있다.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운문사 사리암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을리에 있다. 사리암(邪離庵)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 국사가 937년(고려 태조 20년)에 창건하였다. 그 후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산중 암자로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무정한 세월이 1천여 년 흐른 1845년(조선 헌종 11)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 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며 세상에 알려지자 불자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1년(철종 2)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영험한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알려지며 불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수행처이자 기도 공간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리암에 전해내려 오는 설화가 경내 안내판에 잘 기록되어 있다. 옛날 사리암 바위굴에는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한 사람 분의 쌀이, 두 사람이 공부하면 두 사람 분의 쌀이, 열 사람이 기도를 하면 열 사람 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생긴 대중 한 명이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려고 막대기로 들쑤셨다. 그런데 웬걸 콸콸 쏟아지길 기대했던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솔솔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삿된 마음이 상존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천태각과 관음전이 있고 산신각도 있다. 전각 전체가 벼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천태각과 산신각은 마치 제비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천태각은 참배할 수 있는 공간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참배를 해야 한다. 워낙 급경사라 축벽을 쌓아 불사한 전각들은 지붕을 평탄하게 했고 그 지붕을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리암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태각의 모습이 너무도 눈에 익는다. 바위틈에 자리한 천태각의 모습.지난 겨울 서울 성북구의 삼성암에서 본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찰의 공통점은 기도도량이라는 것이다. 바위가 많은 곳이 기도 도량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주장이 아니다. 불교 신자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인데 굳이 과학적 기술을 동원하지 않아도 바위가 기맥의 증거임은 확연하다. 즉 기맥이 강하기 때문에 기도처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곳 사리암도 바위틈에 지어진 사찰이고 굴과 바위에 지은 천태각, 즉 나반존자를 추모하고 그를 의지하는 독성기도도량으로서의 가치는 이미 충분함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정면의 뛰어난 문필봉이 이곳 스님들의 학문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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