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 관산일정
  • 관산기
  • 포토갤러리
  • 관산자료실

관산기

제목 합수에 자리잡은 삼족대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8-16 조회수 654
첨부파일
내용
청도군 매전면 사무소가 있는 마을에서 운문사가 있는 운문면으로 향하다 보면 곧 금곡리를 만난다. 1킬로 정도의 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다리가 나오고 제법 넓고 깊은 물이 있다. 이곳은 여름에 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 가면 금천면 신지리로 이어지는 마을이다.오른쪽 물이 제법 깊고 많으며 왼쪽 물은 그 양이 적고 거세지도 못하다. 오른쪽 물줄기는 운문댐에서 흘러내려오는 동창천이라 그 수량이 많고 왼쪽은 청도군 매전면의 주산인 해발 756미터의 선의산 여러 골짜기에서 모아진 물이다.
이 두줄기의 물이 모이는 합수지점 위에 전형적인 명당이 있고 이곳에는 한 채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하여 삼족대인데, 예로부터 대(坮), 대(垈), 대(臺)는 다른 곳보다 높은곳이나 바위로 이루어진 절경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삼족대도 다르지 않아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선의산에서 뻗어온 지각이 뻗어내려 산진처에 적당한 크기의 명당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는 삼족당이라는 호를 사용한 긷대유의 신도비도 남아있어 그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김대유 (金大有 1479∼1551(성종 10∼명종 6))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천우(天佑), 호는 삼족당(三足堂). 본관은 김해(金海)다.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숙부 일손(馹孫)이 사형되자,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다음해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임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전적(典籍)·호조좌랑(戶曹佐郎)·칠원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현량과 급제를 취소하자 사임하고 청도(淸道)의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기묘사화이후 별당을 운문 우연(遇淵)에 세우고 스스로 호를 지어 삼족당(三足堂)이라 하니 곡천당, 눌연정, 소요대 등이 모두 선생의 휴식처라, 수행함에 있어 산수 간에 스스로 체득하신 그 고풍아량(高風雅量)은 한점 진루(塵累)가 없었다. 1545년(인종 1) 복과(復科) 소식을 듣고 상경 도중 병이 나서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저서로 《탁영연보(濯穎年譜)》가 있다.
삼족대는 김대유의 흔적이 남아잇는 곳이고 부근에 그의 묘역이 있다하나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삼족대만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열리고 흡족한 것은 매우 뛰어난 산세를 보고 명당을 보았기 때문이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