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역이나 교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지명은 이곳에 향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부근에는 양반들이 세도를 부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밀양에도 교동이 있다. 밀양시청은 북동으로 치우쳐져 있다. 시청 앞의 넓은 도로에서 북동으로 계속가면 밀양의 유명한 얼음골로 이어지는 도로인데, 그 밖에도 울주군이나, 청도, 대구, 경주와 연결된다. 이 도로는 24번 도로이다. 사청 앞에서 24번 도로를 타고 산내면, 산외면 방향으로 약 500여미터를 가다가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금 생경스럽다 싶을 정도로 갑자기 고가들이 나타난다. 아파트와 현개전축이 어우러진 도시에 갑자기 나타나는 고가들은 바로 밀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교동의 향교와 고가들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집은 교동 손씨고가로 불리는 문화재일 것이다. 문밖에 “교동한정식”이라는 간판이 있는 집이다. 밀양시 교동 밀성(密城) 손씨(孫氏) 고택(古宅) 가운데 "만석(萬石)군집"으로 불린 99칸의 저택인데, 숙종연간(1659-1674)에 인묵재(認默齋) 손성증(孫聖曾)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므로 약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집채가 많고 넓은 정원과 마당의 면적 때문에 그 택지가 1천평이 넘으며 건물의 배치 형식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등 내외 생활의 공간 구분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동편에 ㄱ자로 자리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누마루의 날개가 달린 큰 사랑채가 서있고, 그 맞은편 중문을 통하여 작은 사랑채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넓은 사랑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중문을 거치면 넓은 내정(內庭) 북쪽에 7칸 2열의 큼직한 이 집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그 전면과 측면에는 창고, 행랑방, 찬간 등을 설치한 별채 건물이 ㅁ자로 배치되어 있어며 안채 왼쪽뒷편 높다란 곳에는 가묘(家廟)를 안치하였다. 큰 사랑채 뒤꼍과 작은 사랑채 앞뜰에는 각각 널찍한 정원을 꾸며 정서공간으로 두었으며, 안채의 뒤꼍에는 장독대의 시설을 특이하게 해 놓았다. 이 고가는 후방에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밀양향교(密陽鄕校)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전방으로 아동산(衙東山)을 바라보고 있는 남향집으로 옛부터 장자(長子)의 명당(明堂)으로 일컬어 오고 있다. 손대식씨 가옥은 조금 뒤쪽에 있어 주위를 둘러보아야 찾을 수 있다. 밀양시 교동(校洞)지역에 집성촌(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밀양손씨(密陽孫氏) 고가(古家)는 남부지방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웅장(雄壯)한 멋과 건물의 구조(構造)와 배치(配置)에 여유를 한껏 부린 전통한옥(傳統韓屋)의 형식(形式)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903년부터 1945년까지 경부선(京釜線) 철도(鐵道) 부설과 저수지 축소사업 등 대규모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당시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건너온 토목(土木), 건축(建築) 등 각 분야의 기술자들이 대량으로 투입되면서 밀양지역의 건축양식(建築樣式)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들 기술자들이 조선시대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잘 간직해온 밀양지방의 건축물에 일본식(日本式)가옥의 실용적인 내부구조와 적벽돌과 화강석을 이용한 중국식(中國式)의 견실함을 융화시켜 냄으로써 이 고가는 조선시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는 전통한옥의 변천과정(變遷課程)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건물의 건립년대는 19c후반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가 먼저 건립되고 가세가 번성함에 따라 규모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안마당, 사랑마당, 행랑마당의 구분이 명확한 서울식 배치 형식으로 구성방식은 ㄷ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맨 뒤쪽에 별도의 곳간채와 행랑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행랑마당은 통로적인 기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외부에서 안채로 통하는 별도의 중문이 있다. 안채는 6칸반의 3량(樑) 구조로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이 첨가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교동손병순씨고가를 만날 수 있다. 건립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전후로 추정디는데 안채, 사랑채가 한 몸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 사랑마당으로 구분된다. 안마당에 있는 부속채는 최근에 건립된 것이나 원래 그 자리에는 곳간채가 있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좁은 대지에 건립된 도시형(都市形) 한옥의 배치유형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예(例)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후퇴(前.後退)집(맞배지붕)으로 후퇴가 발달하여 겹집화되고 있다. 전면 기둥은 원주(圓柱)이고 부엌부분이 확장되어 사랑채와 연결되고 있다. 사랑채는 3칸 규모이고 전퇴가 있다. 5칸의 중문채가 사랑채에 겹집으로 이어져 있어 한 몸체를 이루고 있다. 미닫이문의 방(房)은 본래 광(庫房)이였는데 최근에 방으로 개조(改造)되었다. 다른 가옥도 대략 비슷한 구조와 각기 다른 구조의 혼합인데 손병준씨 가옥은, 사랑채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886년에 건립된 듯 하며 교동에서도 서촌(西村)에 위치하고 있다. 특이하게 병렬형(竝列形)의 배치형식을 기본으로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에 의해 사랑 마당과 안마당으로 구분되고 있다. 곳간채가 안마당에 놓여 있어 작업기능은 안마당에서 이루어진 듯 하다. 안채는 7칸의 3량(樑) 구조로 합각지붕이다. 전.후퇴(前.後退)집으로 후퇴가 발달하여 겹질화 되고 있다. 내부는 개조(改造)되어 변모된 상태이며 부엌부분은 특히 심하다. 대청 뒷 툇마루도 수장공간(受臟空間)으로 개조되었으며 안채에 마루방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랑채는 4칸의 5량구조로 합각지붕이며 전퇴(前退)가 있고 부분적으로 후퇴(後退)가 있다. 후대(後代)에 사랑방 측면이 부엌으로 확장(확장)되고 그 부분은 눈썹지붕으로 처리되었다. 전면 기둥은 원주(圓柱)이다. 문간채는 최근에 건립된 건물이며 곳간채의 넓은 광(庫房)들이 이 집의 가세(家勢)를 짐작케 한다. 손정식씨 고가는 약 100년을 넘겼는데 사랑채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871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서촌(西村)에 위치하고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ㄱ자형의 사랑채와 곳간채가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중문채가 사랑채에 이어져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모든 집이 연결되어 있으며 문간채는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안채는 7칸의 3량(樑)구조로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이 첨가(添加)되어 있다. 전퇴(前退)가 있고 부분적으로 후퇴(後退)가 있다. 부엌이 증대되어 지붕처리에 변화(부섭지붕)가 있으며 부엌 출입구(出入口) 처리가 독특하다. 사랑채는 4칸의 3량구조를 기본으로 4칸이 직각으로 이어져 있으며 3칸의 중문채가 평행으로 연결되고 있다. 방(房)수가 증가하여 지능분화 (機能分化)가 이루어 졌으며, 뒤쪽 마루에 의해 안마당과 연결되고있다. 전면의 기둥은 원주(圓柱)이다. 아마도 밀양에서 이곳 교동은 반촌이었을 것이다. 매우 뛰어난 문화의 집결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빌딩과 이파트의 숲 속에서 지난날의 영화와 더불어 전통을 지키고 있다. 단지 각 가옥이 지키는 사람이 없고 관리가 부실한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같다.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는 이처럼 민간 문화재는 언제 소멸되어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교통 지역의 각 가옥은 남부지역의 일정 가옥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지역이다. 특히 한결같은 구조는 배산임수의 법칙과 더불어 전착후관, 전저후고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내는 복토, 성토와는 다르고 도로를 등지고 지어지는 경우도 없다. 아직도 이곳에는 많은 고택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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