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 적천사를 찾아 나섰다. 적천사는 청도의 대표적인 전통사찰이다. 전통사찰은 이름처럼 전통을 간직한 절이다. 그러나 일부 사찰은 전통을 간직하였다고 하기보다는 전통을 흉내내기도 한다. 밀양에서 동북으로 빠져나와 밀산교를 건너니 좌측은 청도와 대구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밀양 산내면 얼음골을 지나 울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적천사를 가려하면 다리 앞에서 좌회전하여 청도로 이어지는 25번 도로를 탄다. 25번 도로를 타고 가면 다리 앞에서 약 5키로 정도의 거리에 상동면이 나타난다. 상동면을 지나쳐 1킬로 정도를 가면 좌측으로는 다리를 건너 청도로 가고 우측은 작은 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상동교를 건너 청도지역으로 진입한다. 주의할 것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직진은 매전면으로 가는 길이고 청도 방향으로 가려면 직진하는 듯 비스듬히 좌측으로 올라가는 길을 올라 가야 한다. 곧 이어 미나리가 유명한 마을이 나타나고 좌회전 902번 도로를 무시하고 직진한다. 약 5킬로미터를 더 가면 경상대학교 부속농원 옆을 지나 우측으로 적천사를 알리는 간판이 나타난다. 입구는 넓어 진입이 어렵지 않다. 경부선 지하로 터널을 벗어나면 곧 작은 길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적천사를 알리는 길이 나타난다. 계속 올라가면 원리 큰말이다. 큰말 끝까지 가도 적천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적천사는 큰말 뒤로 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약 3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입구는 좁지만 300여미터를 가면 길이 넓어지며 운전이 쉬워진다. 길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 운전이 쉽게 이어져 사찰 마당에 이르게 된다. 적천사 앞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마치 절마당을 지키는 듯 서있는 이 은행아무는 8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적천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8m, 둘레 8.5m의 크기로 3m 위치까지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3개의 가지로 나뉘어졌다. 맹아 및 유주가 유난히 발달했는데, 맹아는 새로 난 싹을 말하며, 유주는 가지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가지를 말한다. 유주는 일종의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5년(1175)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던 것을 199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 은행나무를 보면 적천사에 다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리 산217번지! 드디어 적천사다. 적천사(蹟川寺)는 신라 문무왕 4년(664년)에 원효대사가 토굴로 창건하였으며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헌덕왕의 셋째 아들인 심지왕사가 이 절에서 공부하여 영심 진표 두 대사로부터 법을 받아 대중창 하였는데 이때에 산내에 백련암, 옥련암, 은적암, 목탁암, 운주암 등을 창건하고 크게 법을 폈으며 1175년(고려 명종 5년)에 보조국사가 절 동북쪽 영산전을 세우고 5백성종(아리한)을 모시는 한편 5백나한을 상주케 하고 조계산 송광사와 같이 불입문자(참선)로 수행케 하므로서 고승 석덕을 배출하였고 보조국사가 친히 심은 은행나무는 8백여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으며 혜철국사 또한 이곳서 성도 했으며 은행나무 주위를 토석으로 환축하고 부리수하 오도경을 상기시키고 임진왜란 당시 병화로 사우 일부가 소실된 것을 1664년(이조 현종 5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이 절을 중건하려 할 때에는 도적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지눌이 가랑잎에 범 호(虎)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떼를 쫓아내었다고 한다. 가장먼저 나타나는 당우는 천왕문이다. 작은 사찰의 경우에는 천왕문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은 의아한 느낌이 든다. 터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이지만 적천사는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다. 천왕문의 천와들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좌우에서 절을 수호(守護)하고 있는 이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몇 조각의 나무를 이어서 제작(製作)하였는데 높이가 3.4m∼3.8m의 거구(巨軀)이다. 각기 비파(琵琶)·칼(劍)·탑(塔)·보주(寶珠) 등의 지물(持物)이 다를 뿐 모두 왼발로 악귀(惡鬼)를 밟고, 화련한 보관(寶冠)과 갑옷, 양 팔에서 날개처럼 펼쳐 올라간 천의(天衣), 마치 광배(光背)를 지닌 것처럼 머리 뒤로 날리는 또 다른 천의 등이 다 같은 모습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발로 악귀를 밟고 있지만 얼굴은 험상궂거나 분노하는 표정이 아닌 오히려 웃음까지 띠고 있는 정감어린 모습이다. 이러한 점은 조선(朝鮮) 후기(後期) 사천왕상(四天王像)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라 하겠다. 이 적천사사천왕상(적川寺四天王像)은 자세가 균형잡히고 보관이나 갑옷의 표현이 치밀한 우수한 작품이며, 더구나 사천왕상 속에서 사리(舍利)·경판(經板)·의류(衣類)·다라니(陀羅尼) 등의 복장품(腹藏品)과 복장기(腹藏記)까지 나와 제작연대(製作年代)(숙종(肅宗) 16년, 1690)를 알 수 있으므로 조선(朝鮮) 후기(後期) 사천왕상(四天王像)의 기준이 되는 작품(作品)으로 높이 평가(評價)된다. 천왕문을 지나면 2층 당우가 나타난다. 일종의 만세루와 같은 구조인데 현판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진응루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옛 것은 아니고 새로 지은 것이다, 아래층은 지은지 얼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화강암이 아주 새것이다. 그러나 2층의 누각은 전통의 방식으로 지어져 운치가 있다. 허리를 숙이듯 안으로 들어가면 대웅전이 나타난다. 대웅전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깊은 당우이다. 대웅전 앞에는 괘불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 괘불을 걸지 않으므로 볼 수는 없었다. 적천사는 비록 규모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 사찰이지만 아기자기한 고졸미를 지니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의 당우 배치가 전형적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의 배치를 이루어 전형적인 명당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적천사는 해발 800미터의 남산을 주산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찰에서는 그다지 급하지 않아 보이는 계곡이 마을에 이르면 제법 그 격이 달라진다. 처도천에 이르는 계곡의 상류에 자리한 적천사는 아마도 비보풍수의 역할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울러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찰림이 매우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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