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불교의 성지,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계곡에는 이름하여 절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절들이 있다. 일일이 찾을 수 없음은 절이 많기 때문이다. 영취산으로 이르는 통도사의 우람한 산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휘휘 가지를 늘이고 있어서 고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통도사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절의 규모가 대단하고 도반이나 불가의 제자들 뿐 아니라, 당연히 찾아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방문객을 듲나들 수 있도록 넓게 포장한 길이 편리성과 산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지만,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현대 불교의 한 단면이다. 통도사 일주문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여러번의 주차장이 나타난다. 우측으로 통도사가 보이지만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입구에서 약 2킬로미터를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 사이에 여러곳의 암자를 지나친다. 통도사에 딸린 산내암자는 대부분 문화재 한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일일이 살피기는 어려운 일이니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자장암을 찾아간다. 통도사로부터 시작되는 영취산 계곡에는 굽이마다, 골곡마다. 배산임수가 이루어지는 명당터에는 20여개의 산내 암자들이 즐비하다. 암자가 너무 많아 절이 신기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이곳이 불교의 신성한 곳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산길을 따라 오르며 들려오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를 듣느라면 온 세상이 바로 불법당이 된다. 절골로 들어서 통도사를 지나 작은 고개하나를 넘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다시 1킬로미터를 가지 못해 산내 암자 중 제일 꼭대기에 있는 백운사로 항하게 되고, 좌측으로 자장암 방향이 나타나며 약 100미터를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다시 좌측길이 자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다시 시작하여 자장암의 간판을 보며 2곳의 암자 입구를 지나 5분 정도 걸어가면 암반으로 절로 감탄이 나오는 계곡이 있고 그 아름다운 경치를 벗삼아 자장암이 자리하고 있다.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신라 선덕여왕 15년(서기 646년))하기에 앞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절실한 기도가 필요했는지 모르겟지만 자장암 자리는 기맥이 유난히 강한 자리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장암이야말로 20여개의 사찰이 들어차 있는 절골의 발원지며 한국 사찰의 역사에서 그 성가를 드높히는 통도사의 모태인 셈입니다. 자장암을 둘러싼 경치는 절경이라 할 수 있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기와지붕과 곧 무너질 듯, 당우로 쓰러질 듯 느껴지는 기암, 그리고 가지가 축축 늘어진 낙락장송이 고색창연한 당우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푸르름을 자랑하는 한국 전래의 육송은 사찰림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할 뿐 아니라 주변에서 창을 내밀 듯 자장암을 향해 내밀어진 바위의 모서리들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위와 낙락장송의 어우러짐속에 많은 전설을 간직한 자장암의 크고작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전각은 고래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있는 당우이고 큰 전각은 새로이 지은 당우로 운치는 떨어지지만 편리성은 높은 건물이다. 길게 사선으로 올라가는 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측면 계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겹다. 계단으로 올라가 좌측의 작은 전각들은 역사를 지닌 오래된 당우들이고 우측은 새로이 지어진 당우들이니 예로부터 자장암이라 하면 계단의 좌측을 이야기한다. 물론 지금 보아도 옴(둥근 원의 형태)의 형태를 지닌 문을 오르기 전 우측의 새로지은 전각들 기초를 보면 현대건축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아무튼 계단으로 올라서니 제일먼저 갈증을 달래 줄 감로전이 눈에 들어온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멈춘 듯 넘치듯 그렇게 흐르고 있다. 감로전 우측으로 있는 전각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며 요사로 가까운 근시일에 지어진 당우들이다. 법당은 왼쪽에 세워진 출입문으로 들어서는데 이 공간이야말로 오래도록 자장암이라는 역사를 지켜온 공간이다. 문짝이 달린 이 출입문엔 “자장암”이란 편액이 달려있다. 그러나 이 문도 최근에 새로 지어졌다. 과거에도 작은 문이 있었을 것이지만 2006년 현재는 새로 지어진 문이다. 출입문의 법당 쪽으로 여닫는 두 짝의 문짝은 파란색 바탕에 수호신인 듯 금강장사가 그려져 있다. 이 문은 단순한 문이 아미라 금강문을 대신하는 문이다. 대찰은 금강문, 사천왕문이 있지만 작은 암자아 같은 경우는 이처럼 문에 금강역사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 공간은 사찰로 들어가는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준다. 금은 사역을 확장해 울타리 밖에 널찍한 요사를 지었지만, 예전엔 출입문 안쪽에 요사가 있었던 작은 암자였음을 알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4간의 요사가 보이고, 우측으로 마애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옆으로 과거 자장전의 주불전이었을 관음전이 보이고 매아불 뒤로 조사전과 그 역할을 같이하는 자장전이 자리잡았다. 주불전인 관음전 뒤쪽은 바로 기암괴석에 낙락장송이 어우러졌던 바로 그 아름답고도 신비감이 느껴지는 절경이다. 둥글둥글한 바위들이 부드럽게 산세를 이어나가 절묘한 곡선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바위 틈새로 잘생긴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습니다. 관음전이 시작되는 지점에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습니다. 이 쌍사자 석등을 경계로 안쪽으로 관음전이 있고 오른쪽에 마애불이 있습니다. 자장암 관음전은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자장암 관음전은 다른 여타의 사찰 양식과 다르게 정면 4간으로 왼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오른쪽은 맞배지붕 형식이다. 이는 우측에 있는 마애불이 잇는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보인다. 바닥도 특이하다. 대부분의 법당들은 나무를 켜서 깐 목재 바닥인데 지장암의 법당 바닥은 짚과 돗자리로 만든 특이한 바닥이다. 또한 눈을 잡는 것은 법당 내외에 걸쳐있는 칼바위로, 바닥 돌을 그대로 살려 법당을 지었기 때문에 바위가 문지방을 지나 법당 바닥에도 예리하게 솟아있다. 관음전이 들어선 자리는 전체적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북의 머리는 관음전 뒤쪽 바위에 있으며, 그 거북의 몸통에 해당하는 자리에 관음전이 세워 졌다고 한다. 자장암에는 이렇듯 거북바위만 있는 게 아니고 마애불 뒤쪽으로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 코끼리 형상을 한 바위, 쥐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도 있다. 관음전 뒤로 돌아가면 바위가 있고 작은 틈이 있는 공간과 구멍이 뚫려있다. 또 대나무가 자란 곳도 있다. 이곳에 금와 화상인지, 보살인지가 살고 있다. 마침 찾아간 날 금와가 나와 바로 내 앞의 관람객은 사진을 찍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이 금와의 전설은 자장암을 빛내는 전설인데 1400년 전부터 자장암 법당 뒤 절벽에서 살고 있다는 개구리에 대한 전설은 여간 심상치 않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가치는 더욱 드높아지고 있다. 이미 통도사를 세우기 전, 영취산에 들어와 이곳 석벽 아래 움집을 짓고 수도하던 자장율사는 그날도 공양미를 씻으러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암벽아래 옹달샘엘 갔다. 바가지로 물을 뜨려던 스님은 샘 안에 있는 개구리를 발견하고 개구리 한 쌍을 건져 근처 숲 속으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샘에 가니 그 두마리 개구리가 다시 그곳에 와 있기에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에도 우물에는 그 개구리들은 또 와 있었다. 율사는 범상치 않은 개구리라 생각되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느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이에 자장율사는 불연(佛緣)이 있는 개구리임을 알고 더 이상 어쩌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엄동설한이 다가왔음에도 개구리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고 늘 샘물 속에서만 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자칫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율사는 이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율사는 절 뒤에 있는 암벽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 주며 “언제까지나 죽지 말고 영원토록 이곳에 살면서 자장암을 지켜다오”하며 수기를 하였다. 그리고 이 개구리를 “금와(金蛙)”라고 불렀다. 그 후로 통도사가 창건되니 통도사 스님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불렀고 바위를 뚫어 만들어 준 개구리 집을 금와석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경봉스님이나 태응스님 등이 이 금개구리를 보거나 현몽함으로 서원하던 일들이 원만히 성취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가하면 의심 많은 어떤 관리도 금개구리의 신통력을 시험하고 크게 깨우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심 많은 한 관리가 금개구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자장암을 찾아와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신통력을 시험하겠다고 다짜고짜 금개구리를 함 속에 넣었다고 한다. 함을 들고 산문으로 나온 관리는 개구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밀폐하였던 뚜껑을 여니, 분명히 잡아넣었던 개구리가 보이지 않았다. 두 눈으로 금개구리의 신통력이 사실임을 확인 한 그 관리는 혼비백산해 자장암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개과천선하였다는 이야기다. 관음전 우측으로 마애불이 있다. 자연바위를 “冂”자로 다듬고, 앞쪽을 조금 더 벌려 세운 병풍 같은 바위삼면에 마애불이 암각되어 있습니다. 정면이 되는 중앙부에는 아미타좌불이 암각 되어 있고, 좌우 각각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암각 되어 있다. 중앙의 아미타부처님은 가슴까지 오른손을 추켜올려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맞댄 중품상생의 수인을 하였고, 하단전 부위에 얹은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를 맞대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셨다. 별다른 문양이 없는 두광에는 군데군데 진언 중의 진언이라는 “옴”자가 범어로 음각되어 있다. 어깨부터 흘러내린 가사의 곡선미와 장삼자락의 펄럭임이 아주 사실적으로 암각 되어 있다. 면을 달리해 암각된 왼쪽의 대세지보살이나 오른쪽 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매우 섬세하고 부드럽게 암각되어 있다. 주불로 모신 아미타좌불의 가슴높이 크기인 두 협시불 역시 화려한 문양은 없으나 부드러운 곡선만으로도 원만함과 대원력 그리고 자비로움이 다 표현되어 있다. 이 마애불은 110년 전에 불각된 것이니, 문화재로 지정된 여타의 다른 마애불들에 비해 그 역사가 유구하지는 않으나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곡선미가 뛰어나다. 왼쪽 면의 대세지보살 아래쪽에 “聖上卽位三十三年 丙申七月日 化主 吉山 定一 金翼來 金弘祚 丁泰燮 李善同 朴漢淳 張雲遠”라는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있어 마애불의 조성일과 화주 명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마애불 앞에는 그리 높진 않은 3층 석탑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수세전(壽世殿)이 있다. 다른 절에서는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을 봉안하고 칠성각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수세전이란 편액을 달았으니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하다. 사찰들은 나름대로 제각각의 특징이 있고 그에 따른 전각의 이름이 지어지지만 수세전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독특하다. 수세전과 직각을 이루고 있는 곳에 자장율사를 기리는 자장전이 있다. 아무래도 자장암의 특징은 마애불일 것이다. 마애불은 물이 흐르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혹, 바위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기는 하지만 물을 바라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특이하고 눈여겨 볼 것은 자장암의 주산이다. 자장암의 주산은 크기 휘돌아 갈고리 모양으로 계곡으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자장암은 배산임수의 법칙에 따라 갈고리 모양의 산을 등에 지고 자리하다보니 결국 물이 흘러내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배치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관음전 뒤에는 우람한 바위들이 드러나 이곳이 매우 뛰어난 기맥을 등에진 기도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바위틈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서 금와가 나온다.마침 찾아간 날도 바로 전 참배자는 금와가 나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모두가 그처럼 운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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