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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능선을 따라 있는 양산 북정리 고분군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8-31 조회수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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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양산시청에서 35번 도로를 이용하여 북상하다가 신기교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먼 산능선을 따라 사적 93호인 양산북정리고분군(梁山北亭里古墳群)이 보인다. 경남 양산시 북정동 697번지가 주소다.
오봉산의 중심이 되는 산등성이 일대에 있는 무덤들. 대형무덤은 산의 윗부분에 퍼져 있고 소형무덤은 비탈진 곳이나 산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같은 무덤의 위치는 시기적인 차이에 따라 무덤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덤들 가운데 부부총과 금조총은 1920년에 조사되었고, 1990년에 내부구조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의 무덤들은 모두 관을 보관하는 돌방(석실)의 앞면이 트인 앞트기식굴방무덤(횡구식석실분)임이 밝혀졌다.
부부총과 금조총은 앞트기식굴방무덤인데, 부부총은 산 위쪽에 자리잡은 대형무덤으로 돌방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흰색으로 칠하여 장식하였다. 반면 금조총은 산의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소형무덤인데, 무덤들이 자리잡은 위치와 형태가 다른 것은 무덤 주인들의 신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제장식품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은 경주지방의 대형무덤에서 나오는 유물과 비슷하다. 부부총의 경우는 남편이 5세기 중반 이후에 먼저 사망하여 무덤을 만들고, 5세기 후반에 부인이 사망하여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 금조총의 주인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전반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의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 친족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측된다.
북정리고분군의 위치는 부부총(夫婦塚)이 있는 오봉산 주능선을 중심으로 그 주변 사면 일대에 등고선과 장축을 나란히 하면서 분포하고 있다. 이중 대형분 또는 고식으로 편년되는 고분은 주능선 정상부쪽으로 치우쳐서 분포하면서 표고상으로는 높은 곳에 해당하며 석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또한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소형분이며 신식으로 편년되는 고분은 반대로 경사면이나 구릉의 말단부에 분포하고 있어서 이 고분군은 구릉 정상부쪽과 높은 곳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여 점차 그 사면과 말단부 저지대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는 시기에 따른 고분의 위치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고분들 가운데는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발굴된 양산부부총과 금제조족(金製鳥足)의 출토로 널리 알려진 금조총(金鳥塚)도 포함된다. 이 유적들은 1990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되고 부부총도 재조사되어 1991년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조사결과 이 지역의 고분들은 모두 횡구식 석실분임이 밝혀졌고 종전에 횡혈식 석실분으로 보고된 부부총도 횡구식 석실분이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 내었다.
이곳의 유구는 대부분 횡구식 석실묘다. 위치에 따라 장축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남-북축이 중심이 되면서 입구의 위치가 북쪽인 것과 남쪽인 것이 있다. 북쪽의 경우 평면이 장방형에 가깝고 석실의 대부분이 지하에 축조된 소위 지하식이며 입구 단벽 전면을 사용하고 높은 광석(광石)이 있다. 그러나 남쪽 것은 평면이 방형에 가까워지고 석실의 대부분이 지상에 설치되면서 입구는 단벽 전체를 사용하지 않고 중앙 또는 좌우측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광석(광石)이 없든지 아니면 1∼2단으로 낮아진다. 따라서 이 지역의 고분 석실은 입구의 위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평면은 장방형에서 방형으로 석실 자체는 지하식에서 반지하식을 거쳐 지상식으로 입구는 전면에서 일부분으로 그리고 광석(광石)은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각기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물론 출토된 유물의 특징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북쪽 입구의 것이 시기적으로 고식에 속하면서 신라지역 전기 고분들과 그리고 남쪽 입구의 것은 신식 고분과 관계가 있다.
석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토기는 좌우 단벽하에 주로 놓이고 마구류를 제외한 금속류는 관대 위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21호분(금조총)을 비롯한 제3호분과 제23호분에서는 출자형금동관식편(出字形金銅冠飾片)이 출토되어 북정리 고분의 피장자 신분을 예상케 하였으며 제14호분에서 출토된 단야구(鍛冶具)는 당시 철기제작자의 신분이 대단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부부총의 출토유물은 토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출자형(出字形) 관식,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반지 등의 장신구류와 안장, 재갈, 행엽, 운주 등의 마구류, 대도, 창, 도자, 활, 화살촉, 화살통 등의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금조총에서는 토기는 물론이고 금제조족을 비롯하여 금동관, 금제귀걸이, 금제팔지, 금제영락, 은제과대, 유리구슬, 곡옥 등의 장신구와 철기, 청동제 초두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양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내용은 경주지방의 대형 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것은 이들 고분에 안치된 피장자는 신라의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자이거나 그와 친족관계에 있는 자로 추정된다.
한편 고분군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신라고분의 경주의 평지에 축조되어 있는데 반해 양산 북정리의 고분들이 구릉의 정상부나 경사면에 분포하는 점은 가야문화의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북정리 고분군은 지리적으로 가야와 신라와 경계지역으로서 시기에 따른 문화내용이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조사된 유구는 가야보다는 신라 쪽에 가까운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고분이라 하지만 산의 능선을 벗어나지 않는 기축선에서 봉분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풍수의 문화가 어느정도는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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