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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우덕이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9-11 조회수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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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안성 청룡산 바우덕이가 이끌던 남사당은 안성 남사당풍물놀이 보존회를 이어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이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바우덕이라는 인물은 조선시대 경기도 안성에 있던 남사당패의 꼭두쇠(우두머리)였다. 원래의 이름은 박암덕(朴岩德)이라고 한다.
남사당패란 남자들만이 모여서 기예를 보여주는 집단을 일컫는 말인데 이러한 집단에 여성 바우덕이가 단원이 되어 대표자의 위치에 있었다. 바우덕이가 역사 속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천민신분이면서 여성으로서 정삼품의 벼슬을 했던 혁명적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삼품의 벼슬을 할 수 있었던 동기는 홍선대원군과의 인연이다. 홍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된 경복궁 중건사업이 당시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고 노무동원에 따른 민심 반발로 어려움에 처함은 물론 동원된 노무자들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자 홍선대원군은 공사를 빨리 마무리하려고 동원된 노동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고육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무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당시 유명한 기예집단을 선발하여 공사현장에서 공연을 하게 했는데 이 때 추천 받은 기예집단이 안성의 남사당패였다.
안성의 남사당패에는 꽃다운 여성 바우덕이가 꼭두쇠가 되어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제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안성남사당패와 바우덕이는 경복궁 공사현장에서 저녁마다 공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노무자들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때는 안성남사당패와 바우덕이의 기예를 관람하면서 피로를 풀고 시름을 달랬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사 진척이 속도가 붙고 덕분에 경복궁 중건사업이 온갓 난관 속에서도 차질없이 진행 되었다. 홍선대원군은 경복궁이 준공되자 그 공로로 바우덕이에게 정삼품 당상관의 벼슬을 하사하였는데 이 사건은 조선시대로서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이 심했던 사회였는데 이 모든 차별을 뛰어 넘어버린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바우덕이는 여성이었고 천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가히 혁명 그 자체다.
바우덕이는 폐병이 걸려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남사당패는 겨울철이면 안성시 서운면 청룡산기슭에 있는 청룡사 머물면서 숙식을 하고 기예 연습을 하였는데 바우덕이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묘는 넓은 바다로 가고 싶으니 개울가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개울가에 만들었으나 유실 되었고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여 이를 다시 복원하여 기념하고 있다.
바우덕이의 묘는 청룡사 입구에서 멀지 않다. 즉 안성에서 임장면 방향으로 나와 청룡사로 가기위해 엽돈재를 향해 3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청룡저수지 못미쳐 바우덕이의 묘가 있다. 묘는 청룡 저수지 아래쪽에 있다.
산자락 끝에 자리한 묘역인데 작은 개울을 건너 산 뿌리 바위위에 그녀의 묘를 알리는 검은 비석이 있다. 묘역에 오르면 산끝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뿌리는 물과 마주치고 있으며 좌우에서 각각 물이 내려와 앞에서 만난다. 만약 이런 곳에서 물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양 옆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예로분터 물소리 나는 곳엔 묘를 쓰지 말라 했다.
좌향을 볼 필요도 없다. 그녀의 묘는 실묘인지, 혹은 가묘인지 알 수 없으나 묘역으로서의 가치는 없으며 단지 그녀를 추모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단지 이곳에서 좌향이나 당판을 논할 수 없지만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묘를 쓰지 않는 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배울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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