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사는 진건면 송능리 천마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 원효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창건 시기와 인물은 알 수 없으며, 봉인사 암자인 부도암(浮屠庵)의 기록으로 단편적인 사실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유적에 대한 기록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봉인사는 계곡 끝에 자리한다. 사능에서 금곡으로 향하는 390 도로에서 송능리 광해군 묘로 들어서는 길로 진입한다. 사능과 멀지 않은 곳이라 찾기가 어렵지 않다. 송능천을 따라 계속 놓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해 들어가야 한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영락교회 공동묘지가 나타나고 광해군 묘역 입구가 나타난다. 지나쳐 게속 오르면 풍양조씨 시조묘 입구를 지나고 곧 임해군의 묘역으로 오르는 입구를 지난다. 다시 300여미터를 올라가면 계곡 정면에 3층의 현대식 건물이 있다. 봉인사다. 봉인사가 현대식 건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정면에 봉인사 풍암취우대사비(楓巖取愚大師碑)가 세워져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비석인데 언뜻 보아서는 옥석을 이용해 새긴 듯한 느낌을 준다. 풍암취우대사비는 한 고승의 행적을 남기고 있다. 취우대사는 1695년(숙종 21)에 출생하여 1766년(영조 42) 6월 27일에 입적하였다. 대사는 15세에 출가하여 회암정혜(晦庵定慧 : 1685∼1741)의 법을 이었기 때문에 부용영관(芙蓉靈觀 : 1485∼1571)의 6세손으로 생각된다. 금강산에서 경전을 강설하다가 보개산에서 10여 년간 정진한 뒤 봉인사로 와서 주석하다가, 1757년에 훼손된 사리탑과 전각을 중수하고 중수비를 세웠다. 대사가 1766년에 입적하자 다비에 부쳐 사리 2과를 얻었는데 이로써 사리탑을 세워 봉안하였고 이듬해인 1767년 7월에 이 탑비를 세웠다. 따라서 원래는 탑비와 가까운 곳에 취우대사 사리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봉인사가 20세기 초에 화재로 사역 전체가 소실되었을 때 이 탑비도 땅 속에 묻혔는데, 1979년 9월 옛 사지에 법당을 짓기 위하여 터를 다지던 중 지중(地中)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총 높이는 173㎝, 비신은 117㎝이다.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제액(題額)은 전서체로 음각하였다. 돌에는 자연적인 무늬가 있어 마치 합장한 도인과 금강역사와 같다고 한다. 앞면에는 취우대사 사리탑비의 내용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시주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좌는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상면에는 복판을 돌리고 사면에 안상을 시문하였다. 옥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아주 뛰어난 형태는 아니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이 비는 이유간(李惟簡)이 찬하고 윤행순(尹行醇)이 글씨를 썼고 조윤형(曺允亨)이 전자를 썼다. 경내로 들어서 삼층건물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삼성각이 보인다. 전형적인 사찰 건물이다. 놀라운 것은 삼층 건물 뒤의 공간인데 무수한 불상이 배열되어 있어 난해할 정도다. 그 옆으로 큰법당이 있다. 큰 법당이라는 말은 대웅전이라는 말과 같은 것인데 간혹 한글로 표시하는 법당이 늘고 있다. 올라가니 모방한 사리탑이 보인다. 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읽기 전에 이미 준비해간 봉인사의 사적기를 읽어본다. 1619년(광해군 11) 중국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오자 이듬해인 1620년에 광해군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봉인사에 석가법인탑(釋迦法印塔)을 세웠는데 이를 수호하기 위해 부도암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사리탑은 남아있지 않다. 일본인들의 만행이다. 1854년(철종 5)에는 혜암(慧庵)화상이 봉인암을 중수하고 탑 전면에 종각(鐘閣)을 지은 후, 강원도 김화(金化)의 수태사(水泰寺)에서 종을 옮겨와 걸었다. 1887년(고종 24) 왕실에서 나라를 위해 그 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향촉(香燭)을 하사했는데 승려들이 황촉등을 법당 중앙에 달고 밤을 새우다가 등이 탁자 아래로 떨어져 불이 나면서 20여 칸의 대법당과 응진전(應眞殿, ·시왕전(十王殿) 등이 불타고 큰방과 노전 두 동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융희연간에 왕가에서 금곡에 홍릉을 만들기로 하자, 절 아래 동네에 사는 이천응(李天應)이 거의 폐사가 된 이 절의 건물을 헐어 홍릉의 전각(殿閣) 용도로 팔아버리고 절의 옛터와 산림 전부는 자신의 소유로 횡점(橫占)했다. 이 때 절의 부도탑과 사리장치(舍利藏置)까지 반출되었으며 완전 폐허화하였다. 1925년에는 주지 동파(東坡)스님이 중수했으며, 그 뒤 폐사되었던 것을 1979년 법사 한길로가 불교수련 도량을 세우기 위해 이곳에 법당을 재건하여 대한불교 원효종에 부속하였다. 사리탑은 모형이다. 부도암사리탑(浮屠庵舍利塔)과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보물 제9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리탑은 1619년(광해군 11)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이듬해인 1620년 5월 14일에 건립한 것이다. 탑 속의 고기(古記)와 중수기를 새긴 비명(碑銘)에서 그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1756년(영조 32)에 풍암취우대사(楓巖取愚大師)가 금강산에서 내려오다가 이 탑이 퇴락한 것을 보고 중수할 뜻을 세워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暎嬪) 이씨와 화완옹주·궁녀들의 시주를 받아 탑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 때 탑 내부에서 나왔던 고기와 새로 지은 중수기를 함께 비석(지금의 중수비)에 새겨 놓았는데, 탑 내부에 봉안된 은제(銀製) 사리호 바닥에는 ‘세자무술생 수복무강 성자창성 만력사십팔년 경신 오월(世子戊戌生 壽福無疆 聖子昌盛 萬曆四十八年 庚申 五月)’이라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어 왕세자의 탄생을 맞아 그의 수복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에서 발원하여 조성하였고 또한 법당을 지어 이를 수호하고 예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리탑 건립에 대한 또 다른 연기(緣起)가 전한다. 광해군이 1610년 2월 29일에 선모 공빈(恭嬪)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면서 묘소도 능으로 격상시키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하였으며, 모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찰로서 부근에 봉인사를 세웠는데 여기에 석가세존의 사리탑을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봉인사는 1900년대 초에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어 폐사되자 1907년에 사지(寺址)에서 사리와 함께 사리탑을 서울 본원사(本院寺)로 옮겼는데 1927년 일본으로 반출되어 얼마 전까지 오사카 시립미술관에서 보존 전시되었다. 1987년 일본인 암전선종(岩田仙宗)이 사리탑을 사리합·중수비와 함께 기증하여 사리탑과 사리장엄구는 1987년 7월 29일에 보물 제928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원 전시하고 있다. 봉인사 사리탑 중수비도 있었다고 한다. 봉인사 사리탑 중수비는 1620년(광해군 12)에 봉안된 사리탑을 취우대사가 1759년(영조 35)에 중수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사리탑을 처음 봉안했던 시기와 약 139년의 차이가 있다. 이 중수비도 사리탑과 마찬가지로 192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오사카 시립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1987년 사리탑과 사리합이 반환될 때 같이 들어와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사리탑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봉인사가 자리한 곳은 전형적인 계곡이다.이는 풍수이론에는 전혀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봉인사는 성묘를 수호하는 원찰의 기능을 지닌 곳이었는지 모른다. 건물의 배치가 풍수의 이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물이 있을 경우 물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고 비켜 세우거나 물 옆의 넓은 터에 새워지는 것이 보통의 풍수법인데 봉인사는 전혀 다르다. 다만 모조사리탑이 세워진 자리만이 계곡이기는 해도 온전한 자리인데 너무도 좁은 지역에 불과하고 계곡풍을 피하기 어렵다. 만약 다른 이치에 따른다면 봉인사가 계곡을 막고 있는 형상은 비보풍수로서 부처님의 원력으로 산 아래 마을로 몰려드는 물을 막기 위한 비보사찰로 보인다. 봉인사에서 가장 기맥이 강한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입구 오른쪽의 지각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기맥이 강한 곳은 아니며 혈장이 이루어진 곳도 아니다. 그러나 기맥을 타고 있어 기도를 하기에는 어울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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